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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0년 당시 조선체육회로 불리웠던 대한체육회가 창립 당시에 시작했다. 이 당시 조선총독부가 이전의 헌병경찰통치를 끝내고 문화통치로 전환하면서 조선인들의 체육증진과 식민지가 되었던 조선의 화합과 단결을 하는 취지에 따라 전국 시도를 중심으로 체육 대회를 시작했는데 이것이 바로 전국체전의 시초다.
제1회 전국체전은 1920년 경기도 경성부(현재의 서울특별시)에서 "전조선 야구대회"라는 이름으로 최초로 개최되었고 이 당시에는 배재고등보통학교 운동장에서 시작되었던 중소규모의 야구대회[5]였으며 종합경기대회로 전환된 것은 그 후로 5년 뒤 1925년부터였다. 여담으로 제1회 전조선야구대회는 한반도 최초의 유료입장을 도입한 대회이기도 하다.[6] 또한 이때 독립운동가인 월남 이상재가 1920년 11월 4일 제1회 전조선야구대회 개막식에서 시구를 했는데 이는 한국야구사에서 가장 오래된 시구 기록이다.
1934년에 가서야 조선체육회가 창설 15주년을 맞이하면서 이 때부터 축구, 테니스, 육상, 농구 등의 경기가 추가되면서 15회 대회부터는 전조선(全朝鮮) 종합경기대회로 명칭을 바꾸고 진화하였다. 그러나 1936 베를린 올림픽 대회 때 손기정의 일장기 말소사건이 발생하고 사건 당사자인 동아일보가 정간조치를 당하게 되면서 1938년에는 결국 조선체육회도 총독부의 훈령에 따라 강제해산되었고 전국체전도 18회를 끝으로 더 이상 열리지 못하게 되었다. 그 이후로 일부 스포츠 출신들이 강제 징병 및 징용을 당하였고 제2차 세계 대전의 발발로 올림픽도 2회 연속으로 개최되지 못하였다.
1945년 8월 해방이 되면서 총독부에 의해 강제해산되었던 조선체육회가 부활하게 되면서 그 해 12월부터 제26회 전국체전을 통해서 부활하게 되었다. 그러나 남북분단으로 인하여 이 대회부터는 남한의 지역단체 위주로 참가할 수 있게 되었다. 1948년에 열렸던 제28회 대회부터는 대한민국 정부 공인대회로 승인되기도 하였다.
1950년 6.25 전쟁 발발 때는 30회 대회가 열리지 못하였다가 1951년 전라남도 광주에서 다시 대회가 열렸으며 이후부터는 서울특별시와 각 지방의 균등한 체육발전을 도모하고 전국체전의 취지에 맞추기 위하여 그 동안 서울특별시에서 연이어 개최하였던 전국체전을 지방으로 확대개최하였고 1957년 38회 대회는 경상남도 부산에서 열렸다.
1961년 부산이 직할시로 승격됨에 따라 42회 대회는 부산직할시가 경상남도 시군 일원이 아닌 부산직할시 명의로 참가함에 따라 이 당시 서울특별시와 함께 독립 자치시 명의로 참가하게 되었다. 그 이후로 1981년에는 경상북도 대구와 경기도 인천이 직할시로 승격되어 독립 참가를 하게 되었고 1986년에는 전라남도 광주가 직할시로 독립 참가를 하였으며 1989년에는 충청남도 대전이, 1997년에는 경상남도 울산이, 2012년에는 충청남도 연기군으로 있었던 세종특별자치시가 독립 참가를 하게 되었다.
국내 외에도 평안남도, 평안북도, 황해도, 함경북도, 함경남도 등 이북5도 선수단 및 재외동포들을 중심으로 결성된 재외동포 선수단도 이 대회에 참가하고 있다. 반면 대한민국 거주 외국인은 전국체전 특성상 아무리 한국에서 장기 거주중이고 영주권을 가지고 있다고 해도 출전 불가능.[7]
서울 공화국과 같은 지방소멸 문제는 큰 치명타라고 한다.
제1회 전국체전은 1920년 경기도 경성부(현재의 서울특별시)에서 "전조선 야구대회"라는 이름으로 최초로 개최되었고 이 당시에는 배재고등보통학교 운동장에서 시작되었던 중소규모의 야구대회[5]였으며 종합경기대회로 전환된 것은 그 후로 5년 뒤 1925년부터였다. 여담으로 제1회 전조선야구대회는 한반도 최초의 유료입장을 도입한 대회이기도 하다.[6] 또한 이때 독립운동가인 월남 이상재가 1920년 11월 4일 제1회 전조선야구대회 개막식에서 시구를 했는데 이는 한국야구사에서 가장 오래된 시구 기록이다.
1934년에 가서야 조선체육회가 창설 15주년을 맞이하면서 이 때부터 축구, 테니스, 육상, 농구 등의 경기가 추가되면서 15회 대회부터는 전조선(全朝鮮) 종합경기대회로 명칭을 바꾸고 진화하였다. 그러나 1936 베를린 올림픽 대회 때 손기정의 일장기 말소사건이 발생하고 사건 당사자인 동아일보가 정간조치를 당하게 되면서 1938년에는 결국 조선체육회도 총독부의 훈령에 따라 강제해산되었고 전국체전도 18회를 끝으로 더 이상 열리지 못하게 되었다. 그 이후로 일부 스포츠 출신들이 강제 징병 및 징용을 당하였고 제2차 세계 대전의 발발로 올림픽도 2회 연속으로 개최되지 못하였다.
1945년 8월 해방이 되면서 총독부에 의해 강제해산되었던 조선체육회가 부활하게 되면서 그 해 12월부터 제26회 전국체전을 통해서 부활하게 되었다. 그러나 남북분단으로 인하여 이 대회부터는 남한의 지역단체 위주로 참가할 수 있게 되었다. 1948년에 열렸던 제28회 대회부터는 대한민국 정부 공인대회로 승인되기도 하였다.
1950년 6.25 전쟁 발발 때는 30회 대회가 열리지 못하였다가 1951년 전라남도 광주에서 다시 대회가 열렸으며 이후부터는 서울특별시와 각 지방의 균등한 체육발전을 도모하고 전국체전의 취지에 맞추기 위하여 그 동안 서울특별시에서 연이어 개최하였던 전국체전을 지방으로 확대개최하였고 1957년 38회 대회는 경상남도 부산에서 열렸다.
1961년 부산이 직할시로 승격됨에 따라 42회 대회는 부산직할시가 경상남도 시군 일원이 아닌 부산직할시 명의로 참가함에 따라 이 당시 서울특별시와 함께 독립 자치시 명의로 참가하게 되었다. 그 이후로 1981년에는 경상북도 대구와 경기도 인천이 직할시로 승격되어 독립 참가를 하게 되었고 1986년에는 전라남도 광주가 직할시로 독립 참가를 하였으며 1989년에는 충청남도 대전이, 1997년에는 경상남도 울산이, 2012년에는 충청남도 연기군으로 있었던 세종특별자치시가 독립 참가를 하게 되었다.
국내 외에도 평안남도, 평안북도, 황해도, 함경북도, 함경남도 등 이북5도 선수단 및 재외동포들을 중심으로 결성된 재외동포 선수단도 이 대회에 참가하고 있다. 반면 대한민국 거주 외국인은 전국체전 특성상 아무리 한국에서 장기 거주중이고 영주권을 가지고 있다고 해도 출전 불가능.[7]
서울 공화국과 같은 지방소멸 문제는 큰 치명타라고 한다.
운영방식은 남녀 고등부, 대학부, 일반부로 분류되며 각 시도의 대표로 나서게 되는 선수들이 경기를 하게 되는 방식으로 진행하게 되고 1, 2, 3위를 획득한 선수에게는 금은동메달이 수여된다. 개최 시도 개인 선수 및 단체 팀에는 20%의 가산점이 주어지며 국군체육부대 소속 단체 팀이나 개인 종목 선수들은 대체로 개최 시도를 대표하여 참가해 왔으나 2010년대 중반에 들어서는 임의로 정하여 참가하는 경향을 보이고 있다. 대체적으로 학교선수의 경우는 그 학교의 소재지의 대표선수로 참가하며, 시, 도청이 아닌 실업팀의 경우[9] 시, 도와 제휴를 맺는 식으로 해당 시, 도를 대표하여 나가게 되는 것이 보통. 학교에 선수가 많으면 본인의 의지에 따라 출신 지방 대표로 나가는 경우도 있다. 한국체육대학교 재학 중 스피스스케이팅 대구 대표로 출전한 김보름 선수의 사례가 그렇다. 시도별 순위는 특이하게 메달 순위가 아닌 메달 득점 + 종합득점제에 따라 결정된다. 종합득점은 각 부문(고등, 대학, 일반)별 배점, 단체 종목 가산점, 개최 시도 가산점 등을 반영해 산정한다. 그래서 메달을 덜 딴 시도가 오히려 더 높은 순위를 기록하는 경우가 생긴다.
전국체전에서 상위권 지역은 서울특별시와 경기도로 이들 지역은 전국체전에서 각각 우승과 준우승을 연달아 기록한 적이 있다. 최다 우승 지역은 서울특별시이나 1995년을 마지막으로 우승을 못하다가 주 개최지가 된 2019년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다시 우승을 했다. 1996년 이래 경기도가 2001년[10]과 2019년을 제외하고는 모두 종합 우승을 차지하며 초강세를 유지하고 있다.
국내 체육 대회 중에서는 가장 위상이 높다 보니 주요 정치인들도 많이 참석하고 대한민국 대통령도 대부분의 대회 개회식에 참석하는 편이다. 다른 일정 때문에 부득이하게 불참해도 국무총리가 대신 참석하는 편이다.
전국체전에서 상위권 지역은 서울특별시와 경기도로 이들 지역은 전국체전에서 각각 우승과 준우승을 연달아 기록한 적이 있다. 최다 우승 지역은 서울특별시이나 1995년을 마지막으로 우승을 못하다가 주 개최지가 된 2019년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다시 우승을 했다. 1996년 이래 경기도가 2001년[10]과 2019년을 제외하고는 모두 종합 우승을 차지하며 초강세를 유지하고 있다.
국내 체육 대회 중에서는 가장 위상이 높다 보니 주요 정치인들도 많이 참석하고 대한민국 대통령도 대부분의 대회 개회식에 참석하는 편이다. 다른 일정 때문에 부득이하게 불참해도 국무총리가 대신 참석하는 편이다.
최소 세미프로화한 리그에서 뛰거나 실력이 출중해서 아시안 게임, 올림픽에 출전할 정도가 되면 프로선수라면 연봉이, 국대급 선수라면 스폰서와 입상했을 경우 추가로 연금 등이 나오니 운동선수 생활을 하는데 문제가 없지만 어중간한 경우 스폰서가 없다면 자비로 활동하거나 국군체육부대에 들어가야 하는데[11], 전국체전 등이 있기 때문에 시-도에서 기초종목 팀을 운영하면서 선수는 운동에 전념하게 되고 시-도측은 홍보 효과를 얻을 수 있다.
물론 전국체전 외에도 많은 대회가 있지만 이런 대회 중에서 전국체전 만한 인지도와 효과가 있는 대회는 없다. 문제점도 있는데 세계적인 성적을 내서 세계 선수권에 나가야 될 선수가 전국체전 출전을 강요 받으며 기간마다 본인에게는 큰 의미가 없는 국내대회를 뛰어야 되는 문제가 있다. 특히 대중적 인지도가 있는 선수들은 대놓고 얼굴마담 자격으로 출전을 강요 받는다.
이형택 같은 경우는 2003년 ATP 투어 남자 단식에서 우승을 차지했는데도 그 해 전국체전을 뛰어야 했다. 그것도 본인의 고향 강원도 횡성군도 아닌 부산광역시 소속으로.[12] 박태환도 부상으로 컨디션이 좋지 않음에도 전국체전에 참가했던 적이 있을 정도. 김연아 역시 부상으로 동계 아시안 게임에 출전하지 못했지만 그 해 동계체전에 출전해야 했던 바 있다.
물론 학생 때부터 전국체전이란 이름이 주는 권위가 있고 애향심 등의 이유로 선수 본인이 강하게 원해서 출전하는 경우도 있긴 하지만 이건 보통 학생 때나 전국체전 우승 = 국내 제일로 통용될 때의 이야기. 그래서 해당선수들의 팬은 선수가 전국체전 나간다면 일단 우려하는 경우가 많다. 2013년 전국체전에선 런던올림픽 체조 금메달리스트 양학선 선수가 연습 도중 부상을 입으며 팬들의 가슴을 철렁하게 하기도. 다행히 큰 부상은 아니었지만 부상을 무릎쓰고 결국 출전을 강행해 난이도가 낮은 기술만 썼으나 압도적인 실력 차로 금메달을 차지하며 전국체전 3연패를 이뤄냈다.
그리고, 이 전국체전이 세계 무대의 벽에 막힌 기초종목의 그들만의 리그를 유지하는 원인이 되기도 한다. 대표적인 사례가 대한민국 육상. 2011년 대구 세계육상선수권 개최 때문에 현시창 신세는 면해야 되지 않겠냐는 지적에 투자와 경쟁 유도로 수십년 묵은 서말구의 100m 한국 신기록을 김국영 선수가 깨긴 했지만 여전히 갈 길이 멀다. 정구처럼 아시안 게임만 국제 대회로 존재하는 종목의 경우는 어쩔수 없이 전국체전이 세계 2번째 권위의 대회가 되기도 한다. 물론 양궁 같이 전국체전 수준이 세계 무대를 아득히 능가하는 경우도 있다.
사이클 도로 종목의 경우 세계 선수권이 있는 10월에 전국체전 일정이 겹치는 경우가 많아 출전권을 가지고도 선수단을 파견하지 않고 있다. 유럽 도시 위주로 개최하는 특성상 파견 비용이나 준비 기간에 비해 선수나 연맹 차원의 이득이 거의 없다 보니 어쩔 수 없다고 하지만 참가선수의 완주 자체가 힘들더라도 국내 유망주와 실력파 선수들이 세계 최정상급 무대를 경험할 값진 기회를 놓치는 것은 분명 안타까운 일이다.
다른 한편으로 우리나라가 세계 최강인 양궁의 경우 국가대표 선발전과 함께 사실상 당해년도의 세계최강 결정전으로 인식되고 있어, 이 전국체전에서 입상하는 것이 올림픽 나가서 금메달 따는 것보다 훨씬 더 어려운 일로 인식되고 있다. 이는 그만큼 우리나라의 양궁 저변이 넓고 탄탄하며 세계구급 선수들이 엄청나게 많이 포진해 있어 이로 인한 경쟁이 매우 치열하게 격화되는 것이기 때문이라고 봐야 할 자랑스러운 현상이라고 할 수 있겠다. 단적인 예로, 360점 만점을 받았는데도 동점자가 2명이나 더 있어서 3등을 하는 기막힌 일을 겪은 선수도 있었다. 2015년에 열린 전국체전에서는 이승윤(20·코오롱 엑스텐보이즈)·김법민(24·대전시체육회)·김규찬(25·예천군청)선수가 36발을 모두 10점 과녁(지름 8cm)에 맞혀서 360점의 만점자가 무려 3명이나 나왔다. 그래서 지름 4㎝인 X-10[13]을 맞힌 횟수로 순위를 정했다고 한다. X-10을 24발 쏜 이승윤과 김법민은 공동 금메달, X-10을 20발 쏜 김규찬[14]은 동메달을 받았다. 덤으로 공동 4위인 계동현, 진재왕은 36발 중 35발을 10점 쏘고, 딱 한발 9점 쏴서 359점을 받았다. 국가대표 단골 멤버인 윤미진 선수도 국내대회를 빈손으로 끝내는 것도 모자라 전국 체전도 아니고 경기도 대표 선발전에서 떨어질 뻔했다.[15] 세계챔피언이 국내대회 출전을 걱정해야 하는 나라가 한국이다. 2016 리우올림픽 남자개인전 준결승에서 슛오프 직전에 박채순 감독이 구본찬 선수에게 한 말도 너 전국체전에서 메달 딸 자신 있어?였다고 한다.[16] 정확히는 ‘야 너 한국 가서 열리는 전국체전에서 금메달 딸 수 있어? 못 따지? 올림픽이 더 편해’였다. 박 감독의 설명으로는 “사실 올림픽이 전국체전보다 쉽다는 생각을 했다. 조금 건방진 이야기일 수 있지만 전국체전에서 금메달 따기 진짜 힘들다. 우리 선수들 실력이 그 정도로 높다.”라고. 2005년 전국체전에서는 그간 전국대회에서 이름조차 내밀지 못했던 신성우라는 선수가 4관왕에 올랐으며, 국내 전국체전 기록이 세계 신기록보다 높게 나오기도 한다.[17] 전국체전 개인전 신기록이 12발에 120점 만점이다. 한 마디로 그냥 다 10점을 쐈다는 소리. 전국 체전에서는 올림픽 금메달리스트도 메달은커녕 초반 광탈이나 안 당하는 것부터 시작해야 한다.
2014년도부터 e스포츠 종목이 신설되었다. 종목은 리그 오브 레전드, 카트라이더, 스타크래프트 2, 피파온라인 3다. 다만 이것은 정식 종목은커녕 시범 종목도 아닌 동호인 종목이다. 용무도라거나, 산악, 오리엔티어링, 브라질리언 주짓수[18], 양궁 컴파운드 부문, 플로어볼, 마샬아츠, 족구, 패러글라이딩, 사회인야구 등으로 말하자면 생활체육인들의 장이라고 할 수 있다. 물론 여기서 오래 있다가 메달 산정에 합산이 되는 시범 종목으로 올라갈 수도 있다. 단적으로 바둑이 이런 형태로 시범 종목이 됐다. 다만 현시창인 것이 전국체전은 2016년부터 10개 이상 메달 산정종목을 줄일 것을 예정하고 있다. 때문에 이전 정식종목들도 줄줄이 떨어져 나갈 것이다. 때문에 e스포츠가 정식 스포츠로 인정받게 될 날은 아직 까마득하다고 할 수 있다.
2020 전국체전은 코로나19로 취소했고 2021 전국체전도 역시 코로나19 확산 탓에 고등부만 남긴 채 대학부와 일반부를 취소했다. 사실, 2021년에도 역시 전국체전 취소 의견이 나왔으나 고등학생의 경우 전국체전 취소 시 대학 진학의 지장을 우려하는 선수가 많아 대학 입시가 걸린 만큼 고등부만 경기를 치렀다. 이에 체육계와 개최지인 경상북도, 문화체육관광부에서는 전국체전을 정상적으로 개최해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코로나19 집단 감염 우려를 한 질병관리청의 탓에 축소 개최를 성사한 것이다.
2022 전국체전은 코로나19 이후 3년 만에 울산에서 정상적으로 개최했다.
주요 경기는 KBS가 중계를 전담하고 있다. 지상파 낮방송 개시 전(2005년 12월)에는 전국체전이라 해도 시청률이 어느정도 나왔던 편이었기 때문에 MBC, SBS에서도 개막식과 주요 경기를 중계하는 등 비중있게 방송했으나 낮방송 개시 후에는 KBS가 전담한다.
물론 전국체전 외에도 많은 대회가 있지만 이런 대회 중에서 전국체전 만한 인지도와 효과가 있는 대회는 없다. 문제점도 있는데 세계적인 성적을 내서 세계 선수권에 나가야 될 선수가 전국체전 출전을 강요 받으며 기간마다 본인에게는 큰 의미가 없는 국내대회를 뛰어야 되는 문제가 있다. 특히 대중적 인지도가 있는 선수들은 대놓고 얼굴마담 자격으로 출전을 강요 받는다.
이형택 같은 경우는 2003년 ATP 투어 남자 단식에서 우승을 차지했는데도 그 해 전국체전을 뛰어야 했다. 그것도 본인의 고향 강원도 횡성군도 아닌 부산광역시 소속으로.[12] 박태환도 부상으로 컨디션이 좋지 않음에도 전국체전에 참가했던 적이 있을 정도. 김연아 역시 부상으로 동계 아시안 게임에 출전하지 못했지만 그 해 동계체전에 출전해야 했던 바 있다.
물론 학생 때부터 전국체전이란 이름이 주는 권위가 있고 애향심 등의 이유로 선수 본인이 강하게 원해서 출전하는 경우도 있긴 하지만 이건 보통 학생 때나 전국체전 우승 = 국내 제일로 통용될 때의 이야기. 그래서 해당선수들의 팬은 선수가 전국체전 나간다면 일단 우려하는 경우가 많다. 2013년 전국체전에선 런던올림픽 체조 금메달리스트 양학선 선수가 연습 도중 부상을 입으며 팬들의 가슴을 철렁하게 하기도. 다행히 큰 부상은 아니었지만 부상을 무릎쓰고 결국 출전을 강행해 난이도가 낮은 기술만 썼으나 압도적인 실력 차로 금메달을 차지하며 전국체전 3연패를 이뤄냈다.
그리고, 이 전국체전이 세계 무대의 벽에 막힌 기초종목의 그들만의 리그를 유지하는 원인이 되기도 한다. 대표적인 사례가 대한민국 육상. 2011년 대구 세계육상선수권 개최 때문에 현시창 신세는 면해야 되지 않겠냐는 지적에 투자와 경쟁 유도로 수십년 묵은 서말구의 100m 한국 신기록을 김국영 선수가 깨긴 했지만 여전히 갈 길이 멀다. 정구처럼 아시안 게임만 국제 대회로 존재하는 종목의 경우는 어쩔수 없이 전국체전이 세계 2번째 권위의 대회가 되기도 한다. 물론 양궁 같이 전국체전 수준이 세계 무대를 아득히 능가하는 경우도 있다.
사이클 도로 종목의 경우 세계 선수권이 있는 10월에 전국체전 일정이 겹치는 경우가 많아 출전권을 가지고도 선수단을 파견하지 않고 있다. 유럽 도시 위주로 개최하는 특성상 파견 비용이나 준비 기간에 비해 선수나 연맹 차원의 이득이 거의 없다 보니 어쩔 수 없다고 하지만 참가선수의 완주 자체가 힘들더라도 국내 유망주와 실력파 선수들이 세계 최정상급 무대를 경험할 값진 기회를 놓치는 것은 분명 안타까운 일이다.
다른 한편으로 우리나라가 세계 최강인 양궁의 경우 국가대표 선발전과 함께 사실상 당해년도의 세계최강 결정전으로 인식되고 있어, 이 전국체전에서 입상하는 것이 올림픽 나가서 금메달 따는 것보다 훨씬 더 어려운 일로 인식되고 있다. 이는 그만큼 우리나라의 양궁 저변이 넓고 탄탄하며 세계구급 선수들이 엄청나게 많이 포진해 있어 이로 인한 경쟁이 매우 치열하게 격화되는 것이기 때문이라고 봐야 할 자랑스러운 현상이라고 할 수 있겠다. 단적인 예로, 360점 만점을 받았는데도 동점자가 2명이나 더 있어서 3등을 하는 기막힌 일을 겪은 선수도 있었다. 2015년에 열린 전국체전에서는 이승윤(20·코오롱 엑스텐보이즈)·김법민(24·대전시체육회)·김규찬(25·예천군청)선수가 36발을 모두 10점 과녁(지름 8cm)에 맞혀서 360점의 만점자가 무려 3명이나 나왔다. 그래서 지름 4㎝인 X-10[13]을 맞힌 횟수로 순위를 정했다고 한다. X-10을 24발 쏜 이승윤과 김법민은 공동 금메달, X-10을 20발 쏜 김규찬[14]은 동메달을 받았다. 덤으로 공동 4위인 계동현, 진재왕은 36발 중 35발을 10점 쏘고, 딱 한발 9점 쏴서 359점을 받았다. 국가대표 단골 멤버인 윤미진 선수도 국내대회를 빈손으로 끝내는 것도 모자라 전국 체전도 아니고 경기도 대표 선발전에서 떨어질 뻔했다.[15] 세계챔피언이 국내대회 출전을 걱정해야 하는 나라가 한국이다. 2016 리우올림픽 남자개인전 준결승에서 슛오프 직전에 박채순 감독이 구본찬 선수에게 한 말도 너 전국체전에서 메달 딸 자신 있어?였다고 한다.[16] 정확히는 ‘야 너 한국 가서 열리는 전국체전에서 금메달 딸 수 있어? 못 따지? 올림픽이 더 편해’였다. 박 감독의 설명으로는 “사실 올림픽이 전국체전보다 쉽다는 생각을 했다. 조금 건방진 이야기일 수 있지만 전국체전에서 금메달 따기 진짜 힘들다. 우리 선수들 실력이 그 정도로 높다.”라고. 2005년 전국체전에서는 그간 전국대회에서 이름조차 내밀지 못했던 신성우라는 선수가 4관왕에 올랐으며, 국내 전국체전 기록이 세계 신기록보다 높게 나오기도 한다.[17] 전국체전 개인전 신기록이 12발에 120점 만점이다. 한 마디로 그냥 다 10점을 쐈다는 소리. 전국 체전에서는 올림픽 금메달리스트도 메달은커녕 초반 광탈이나 안 당하는 것부터 시작해야 한다.
2014년도부터 e스포츠 종목이 신설되었다. 종목은 리그 오브 레전드, 카트라이더, 스타크래프트 2, 피파온라인 3다. 다만 이것은 정식 종목은커녕 시범 종목도 아닌 동호인 종목이다. 용무도라거나, 산악, 오리엔티어링, 브라질리언 주짓수[18], 양궁 컴파운드 부문, 플로어볼, 마샬아츠, 족구, 패러글라이딩, 사회인야구 등으로 말하자면 생활체육인들의 장이라고 할 수 있다. 물론 여기서 오래 있다가 메달 산정에 합산이 되는 시범 종목으로 올라갈 수도 있다. 단적으로 바둑이 이런 형태로 시범 종목이 됐다. 다만 현시창인 것이 전국체전은 2016년부터 10개 이상 메달 산정종목을 줄일 것을 예정하고 있다. 때문에 이전 정식종목들도 줄줄이 떨어져 나갈 것이다. 때문에 e스포츠가 정식 스포츠로 인정받게 될 날은 아직 까마득하다고 할 수 있다.
2020 전국체전은 코로나19로 취소했고 2021 전국체전도 역시 코로나19 확산 탓에 고등부만 남긴 채 대학부와 일반부를 취소했다. 사실, 2021년에도 역시 전국체전 취소 의견이 나왔으나 고등학생의 경우 전국체전 취소 시 대학 진학의 지장을 우려하는 선수가 많아 대학 입시가 걸린 만큼 고등부만 경기를 치렀다. 이에 체육계와 개최지인 경상북도, 문화체육관광부에서는 전국체전을 정상적으로 개최해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코로나19 집단 감염 우려를 한 질병관리청의 탓에 축소 개최를 성사한 것이다.
2022 전국체전은 코로나19 이후 3년 만에 울산에서 정상적으로 개최했다.
주요 경기는 KBS가 중계를 전담하고 있다. 지상파 낮방송 개시 전(2005년 12월)에는 전국체전이라 해도 시청률이 어느정도 나왔던 편이었기 때문에 MBC, SBS에서도 개막식과 주요 경기를 중계하는 등 비중있게 방송했으나 낮방송 개시 후에는 KBS가 전담한다.
회수(연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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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회 명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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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최지
|
우승
|
비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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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회
(1920년) |
전조선야구대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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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도 경성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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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상 최초로 개최된 전국민 체육대회. 단 종목은 야구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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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회
(1921년) |
조선체육대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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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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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회
(1922년)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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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회
(1923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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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회
(1924년)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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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회
(1925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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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종합 경기 대회로 전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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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회
(1926년)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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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회
(1927년)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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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회
(1928년)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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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0회
(1929년)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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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1회
(1930년)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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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2회
(1931년)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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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3회
(1932년)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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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4회
(1933년)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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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5회
(1934년) |
전조선 종합경기대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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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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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종합경기대회 방식 채택 및 명칭 변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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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6회
(1935년)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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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7회
(1936년)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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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8회
(1937년)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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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5회 (1938 ~ 1944년) |
대회 중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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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선체육회 해체 및 총독부 금지령에 따라 광복 때까지 열리지 못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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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6회
(1945년) |
전조선 종합경기대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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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도 경성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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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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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해방 이후 처음으로 열리는 대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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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7회
(1946년) |
경기도 경성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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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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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8회
(1947년)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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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9회
(1948년) |
전국체육대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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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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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0회
(1949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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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0년) |
대회 취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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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2회
(1951년) |
전국체육대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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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3회
(1952년) |
- 전쟁 중 일부 경기 한정으로 개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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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4회
(1953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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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5회
(1954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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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6회
(1955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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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7회
(1956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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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8회
(1957년) |
- 사상 2번째 지방 개최, 지방 순회 개최 시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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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9회
(1958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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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0회
(1959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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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1회
(1960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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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2회
(1961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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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3회
(1962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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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4회
(1963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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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5회
(1964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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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6회
(1965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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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7회
(1966년) |
- 대한체육회가 직접 주관하는 체제로 변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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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8회
(1967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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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9회
(1968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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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0회
(1969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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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1회
(1970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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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2회
(1971년) |
- 소년체전 별도 신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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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3회
(1972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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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4회
(1973년) |
- 직할 시 승격 이후 첫 개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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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5회
(1974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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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6회
(1975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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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7회
(1976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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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8회
(1977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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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9회
(1978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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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0회
(1979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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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1회
(1980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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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2회
(1981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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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3회
(1982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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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4회
(1983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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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5회
(1984년) |
- 직할 시 승격 후 첫 개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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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6회
(1985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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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7회
(1986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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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8회
(1987년) |
- 직할 시 승격 후 첫 개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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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9회
(1988년) |
전국 일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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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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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종목별 규모대회와 겸하여 종목별 종합 시상만 시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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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0회
(1989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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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1회
(1990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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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2회
(1991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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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3회
(1992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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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4회
(1993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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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5회
(1994년) |
- 직할시 승격 후 첫 개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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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6회
(1995년) |
- 사상 최초로 도청 소재지가 아닌 곳이 주 개최지로 지정됨.[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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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7회
(1996년) |
- 이를 빌미로 북한 측에서 김영삼 당시 대통령 암살을 시도했음. 그래서 발생한 사건이 강릉 무장공비 침투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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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8회
(1997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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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9회
(1998년) |
- 사상 최초로 제주도에서 개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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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0회
(1999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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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1회
(2000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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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2회
(2001년) |
- 1952년 대회 이후 49년 만에 비수도권팀(충청남도) 체전 종합 우승이자 충남팀 첫 우승.
- 그러나 충남의 우승은 청탁과 편파판정의 결과라는 비판 탓에 9개 시도 선수단이 폐막식에 대거 불참했다. 참조.[2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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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3회
(2002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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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4회
(2003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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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5회
(2004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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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6회
(2005년) |
- 광역시 승격 이후 첫 개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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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7회
(2006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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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8회
(2007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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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9회
(2008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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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0회
(2009년) |
- 신종플루의 발병화로 인해 위생 및 보건향상 강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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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1회
(2010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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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2회
(2011년) |
- 사상 최초로 경기장이 아닌 일산호수공원에서 개막식 진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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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3회
(2012년) |
- 세종특별자치시가 출범 이후 첫 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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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4회
(2013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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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5회
(2014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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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6회
(2015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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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7회
(2016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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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8회
(2017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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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9회
(2018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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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00회
(2019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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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 |
대회 취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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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19 확산 여파로 1년씩 순연되었지만, 한국 전쟁 발발로 열리지 못한 1950년 제31회 대회 사례를 들어 열리지 못하게 된 2020년 대회를 101회로 규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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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02회
(2021년) |
전국체육대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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없음[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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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03회
(2022년) |
- 제100회 전국체전 이후 오랜만에 정상적으로 선수단이 참가하여 개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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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04회
(2023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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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05회
(2024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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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06회
(2025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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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07회
(2026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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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08회
(2027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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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7년 지방 순회 개최 원칙이 도입된 후 개최예정지가 결정된 2023년 전국체전까지 지역별로 대회 개최 횟수를 정리하면 아래와 같다. 복수의 지역에서 분산 개최된 1986년과 1988년 대회는 집계 대상에서 제외했다.
지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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횟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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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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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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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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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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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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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도시 내에 대형 체육시설이 없는 세종특별자치시만 전국체전 개최 기록이 없다.
동계 스포츠 종목의 전국체전이다.
회수(연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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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최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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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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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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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회~제90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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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1회
(2010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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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2회
(2011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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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3회
(2012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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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4회
(2013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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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5회
(2014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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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6회
(2015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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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7회
(2016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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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8회
(2017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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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9회
(2017년~ 2018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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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00회
(2019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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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01회
(2020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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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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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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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03회
(2022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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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04회
(2023년) |
- 분산 개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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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05회
(2024년) |
- 스피드 스케이팅과 산악은 각각 서울과 전북에서 운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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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06회
(2025년)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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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로 경기도가 우승, 서울특별시가 준우승, 강원도가 3위를 한다.
전국체전의 패럴림픽이다.
동계체전의 패럴림픽이다.
초등학교와 중학교에 재학 중인 운동부 선수들을 대상으로 개최하는 대회로[37] 매년 5월 마지막주에 4일간 연다. 약칭은 소년체전. 1972년부터 개최되고 있으며 1994년 대회부터는 소년체전 개최년도 1년 전의 전국체전 개최지에서 소년체전을 여는 것으로 규정이 정해졌다.[38] 전국체전과 마찬가지로 대한체육회가 개최하는 대회다. 과거에는 소년체전도 뉴스에 보도될 정도로 꽤 시끌벅적하게 치러졌지만 시대가 변하면서 소년체전에 대한 관심은 급격히 줄었다.
전국체전이 비인기종목 실업팀 선수들의 보루라면 소년체전은 각 종목의 전국대회와 더불어 학생 선수들의 상급 학교 진학을 위한 중요 대회 중 하나다. 일각에서는 학교 운동부에서 발생하고 있는 각종 폭력과 성추행 등을 비판하며 소년체전을 폐지하고 운동부 학생과 학교 내 아마추어 스포츠클럽이 함께 참여하는 '청소년 스포츠축전'으로 개편하자는 의견이 나오고 있다.
전국체전이 비인기종목 실업팀 선수들의 보루라면 소년체전은 각 종목의 전국대회와 더불어 학생 선수들의 상급 학교 진학을 위한 중요 대회 중 하나다. 일각에서는 학교 운동부에서 발생하고 있는 각종 폭력과 성추행 등을 비판하며 소년체전을 폐지하고 운동부 학생과 학교 내 아마추어 스포츠클럽이 함께 참여하는 '청소년 스포츠축전'으로 개편하자는 의견이 나오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