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白头山(간체)·白頭山(번체)
(Baitoushan, 바이터우산) |
만주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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ᡤᠣᠯᠮᡳᠨ ᡧᠠᠩᡤᡳᠶᠠᠨ ᠠᠯᠢᠨ
(golmin šangiyan alin)[6] |
백두산(白頭山)은 한반도에서 가장 높은 산이다.[7] 북한과 중국의 국경에 있는 화산으로 화산의 분류 체계에 따르면 성층 화산, 활화산, 초화산에 속한다.
봉우리는 총 16개이고 최고봉은 해발 2,744m인 병사봉(兵使峰)으로 북한에 속해 있으며, 북한에서는 이를 장군봉으로 부른다(명칭 문단 참조). 따라서 중국을 통해 관광이 가능한 남한 사람은 정상에 오를 수는 없고 천지 너머에서 바라볼 수만 있다. 각 봉우리 정상 사이에는 칼데라 호수인 천지를 품었다. 백두산의 천지와 주변 수계는 압록강, 두만강, 송화강의 발원지이기도 하다.
전통적인 풍수지리에서는 한반도의 '조종산(祖宗山)', 즉 모든 산맥의 시작점으로 여겨지며, 특히 근대 이후에는 민족의 영산(靈山)으로 자리매김하여 남북한 양쪽에서 특별한 의미를 가진 상징물이 되었다. 분단 이후에도 행정구역이나 교육[8] 등 공식적인 부문에서는 남북 모두 백두산을 자국의 산으로 간주한다.[9][10]
봉우리는 총 16개이고 최고봉은 해발 2,744m인 병사봉(兵使峰)으로 북한에 속해 있으며, 북한에서는 이를 장군봉으로 부른다(명칭 문단 참조). 따라서 중국을 통해 관광이 가능한 남한 사람은 정상에 오를 수는 없고 천지 너머에서 바라볼 수만 있다. 각 봉우리 정상 사이에는 칼데라 호수인 천지를 품었다. 백두산의 천지와 주변 수계는 압록강, 두만강, 송화강의 발원지이기도 하다.
전통적인 풍수지리에서는 한반도의 '조종산(祖宗山)', 즉 모든 산맥의 시작점으로 여겨지며, 특히 근대 이후에는 민족의 영산(靈山)으로 자리매김하여 남북한 양쪽에서 특별한 의미를 가진 상징물이 되었다. 분단 이후에도 행정구역이나 교육[8] 등 공식적인 부문에서는 남북 모두 백두산을 자국의 산으로 간주한다.[9][10]
북한의 량강도에 속하는 삼지연시와 중국의 지린성에 속하는 연변 조선족 자치주의 사이에 있다. 대한민국의 명목상 행정구역[11]으로는 함경남도 혜산군 보천면[12]과 함경북도 무산군 삼장면에 걸치며, 천지(용왕담) 전역은 혜산군 보천면 관할이다.
대만의 명목상 행정구역으로는 안둥성(安東省) 창바이현(長白縣)과 쑹장성(松江省) 안투현(安圖縣)에 걸친다. 천지는 창바이현 관할. 한반도 면적보다 넓은 만주 전체로 보아도 백두산 보다 높은 산은 없다. 즉, 한반도와 만주 전체에서 가장 높은 산. 그렇기에 만주족 입장에서도 상징적인 의미를 가진 산이다.
대만의 명목상 행정구역으로는 안둥성(安東省) 창바이현(長白縣)과 쑹장성(松江省) 안투현(安圖縣)에 걸친다. 천지는 창바이현 관할. 한반도 면적보다 넓은 만주 전체로 보아도 백두산 보다 높은 산은 없다. 즉, 한반도와 만주 전체에서 가장 높은 산. 그렇기에 만주족 입장에서도 상징적인 의미를 가진 산이다.
백두산의 높이는 나라마다 조금씩 다르다. 이는 대한민국ㆍ북한ㆍ중국 세 나라가 해발고도를 재는 기준이 서로 다르기 때문이다.[13] 참고로 한국인이 익히 아는 2,744m는 일제강점기 때 측량한 값이다. 일제가 측량한 것이 문제가 아니라, 이 당시에는 인공위성이 없었다. 인류가 인공위성을 활용하기 이전에는 높이가 알려진 곳에서 삼각 측량법으로 산(山)의 높이를 쟀기 때문에 현대적 기준이나 공법에 따른 측량 결과와 비교하면 오차가 있을 수 있다.
해발고도와 구분되는 기복량(起伏量)이란 개념이 있는데, 일정한 범위 안에서 가장 높은 곳과 가장 낮은 곳의 높이 차를 말한다. 범위를 1km2로 하여 한반도 전역의 기복량을 비교하여 백두산의 기복량은 2,505m라고 밝힌 논문이 있다.[14]
해발고도와 구분되는 기복량(起伏量)이란 개념이 있는데, 일정한 범위 안에서 가장 높은 곳과 가장 낮은 곳의 높이 차를 말한다. 범위를 1km2로 하여 한반도 전역의 기복량을 비교하여 백두산의 기복량은 2,505m라고 밝힌 논문이 있다.[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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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두산은 복합 화산체로서 거대한 순상 화산체 위에 성층 화산체 3개와 측화산 수백 개가 발달한, 아주 복잡한 구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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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두산 하부의 순상 화산체는 최소 100km가 넘기에 백두산은 세계적으로 손에 꼽는 넓은 산이다. 만약 백두산이 서울 한복판에 있었다면 산체는 경기도 전체를 덮고도 남을 것이다. 산체를 이루는 활화산 중에서 백두산보다 더 넓은 화산은 아프리카 최고봉인 킬리만자로산과 수면 아래의 넓이까지 포함한 마우나로아뿐이다. 이러한 순상 화산체의 면적은 중국과 북한 쪽 합하면 대략 제주도의 5배에 달하며, 중국에서 주장하는 면적은 제주도의 15배까지도 늘어날 정도로 엄청난 면적을 자랑한다.
이러한 순상 화산체의 위로 거대한 성층 화산체 3개가 잘 발달했다. 이 성층 화산체들은 모두 칼데라가 되었는데 우리가 익숙히 알고 있는 천지 칼데라, 그리고 망천아 칼데라[15], 남포태산과 북포태산이 외륜산을 이루는 포태산 칼데라이다. 이 3개 성층 화산체는 모두 기원이 같은 조면 현무암 마그마에서 비롯되었기 때문에 같은 백두산이라고 본다.
백두산에서 가장 오래된 화산체는 백두산 하부의 순상 화산체이고, 그 다음으로 망천아 칼데라와 포태산 칼데라, 천지 칼데라 순이다. 망천아 칼데라는 대략 4백만 년 전 조면 현무암 중심 분출이 시작되며 형성되기 시작했고, 이 후 대략 2백만 년 전부터 현재의 천지 칼데라와 포태산 칼데라의 위치에서 조면 현무암이 분출되어 거대한 성층 화산체를 이루었다. 한때 광활한 순상 화산체 위로 성층 화산체 연봉 3개가 우뚝 솟은 모습은 엄청난 장관이었을 것이다. 이 3개 화산체는 현재 불규칙한 칼데라를 이룬다. 이러한 불규칙한 형태의 칼데라들은 백두산에서 VEI 6-7 이상의 거대 분화가 946년에만 있었던 것이 아닌 것을 증명한다.
백두산에서 가장 먼저 형성된 칼데라는 망천아 칼데라이다. 망천아가 백두산의 맏형 답게 가장 먼저 가장 큰 칼데라를 남기고 사화산이 되었으며 남쪽을 향하여 길게 침식곡과 빙하의 흔적인 카르가 발달해있다. 순상화산 형성 후, 최초의 성층화산체이지만 이 당시 백두산 마그마의 온도는 현재보다 뜨거웠기에 마그마는 더 멀리 퍼져 성층 화산체 자체는 가장 크다.
그 다음으로 포태산 칼데라가 만들어졌다. 포태산 칼데라는 북한에 위치해 있어 연구가 가장 잘 되지 않은 지역 중 하나이다. 포태산은 특이하게 남북으로 길게 늘어져 있어 마치 칼데라가 아닌 계곡처럼 보이지만 이는 빙하로 인한 침식으로 칼데라가 매워졌기 때문으로 추정된다. 또한 빙하의 흔적인 카르가 외륜산인 북포태산과 남포태산 전체에 발달해 있어 침식이 가장 심하며 멀리서 보면 일반적인 산처럼 보인다는 특징이 있다. 그러나 이 지역은 확실한 칼데라이며, 그 크기로 봐서는 수 차례 대규모 분화를 일으켰을 것으로 추정한다. 현재는 사화산이다.
백두산은 동아시아의 대표적인 판내부 화산(intraplate volcano)이다. 백두산의 형성 원인은 아직 제대로 밝혀지지 않았다. 북한에서는 열점을 주장하나 남한과 해외 화산 학계에서는 열점은 아니라고 보는데, 대표적으로 인정받는 이론으로는 BMW 이론이 있다.
BMW 이론은 백두산 분화의 동력이 서태평양판의 섭입 때문이라는 주장이다. 태평양판은 일본 아래로 400 km 지점까지 섭입된다. 그리고 한반도 아래에서 수평으로 섭입 방향이 바뀐다. 수평이동 하던 태평양판이 백두산 부근에서 정체되고, 판에서 탈수 증상이 일어나기 시작한다. 높은 압력 때문에 탈수된 물이 주변의 암석과 뒤섞여 마그마가 되어 천천히 상승한다. 그리고 그것이 백두산의 마그마 방으로 공급된다는 이론이다. 그러나 이 이론에는 약점이 존재한다. 첫 번째로 백두산의 마그마는 태평양판에서 공급되는데, 같은 기원인 일본의 화산들과는 마그마 성분이 너무나 다르다는 것이다. 두 번째로 왜 백두산 아래에서 탈수 현상이 일어나는가이다. 세 번째로 위와 같은 이유라면 백두산의 화산활동은 수천만 년 동안 지속되었어야 했는데 백두산이 형성되기 시작한 것은 500만 년 전이다.
오창환 전북대 교수는 이러한 문제들에 대해 새로운 의견을 제시했다. 한반도 화산들은 태평양판의 섭입이 아닌 인도판의 아시아 충돌로 인한 것이라고 설명한 것이다. 동해가 갈라진 것도 인도판의 충돌 영향이기에 울릉도와 그 주변 해저 화산 또한 인도판의 충돌 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 백두산의 경우를 보자면 인도판의 충돌로 동아시아 지각에 엄청난 에너지가 전달된다. 그로 인해 수많은 단층이 형성되었고 곳곳에 에너지가 응집되었다. 인도판과 유라시아 판의 충돌은 계속되고 있기에 그 에너지는 계속 모이고 모인다. 그리고 어느 순간 임계점을 넘어 그 에너지가 화산의 형태로 분출된다는 것이다. 이 설명은 백두산은 물론 추가령 화산, 만주와 몽골의 여러 화산들의 생성 원인을 설명할 수 있다.
그러나 백두산을 이해하기 위해선 오창환 교수의 설명으로는 부족하다. 만주와 추가령 구조곡의 화산들은 단층에 의한 침식이 화산 활동으로 복구 되자 활동이 아주 약해지거나 사실상 정지되었지만, 백두산은 그렇지 않았기 때문이다.
백두산에도 미샨 푸순 단층이라는 거대 단층이 존재한다. 초기 백두산이 형성되기 전, 단층과 하천의 발달로 급격한 침식이 일어나 반작용으로 상승류가 유발했다고 추정된다. 이는 추가령 구조곡의 화산과 비슷하다. 참고로 서울 경기를 지나가는 추가령 구조곡엔 화산이 없다. 이는 평지 지역으로 오히려 퇴적 현상이 일어나 압력이 일정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산지를 지나는 단층은 침식이 빠르게 일어나 상승류가 일어나기 쉽다. 이 때문에 강원도 산지를 지나가는 추가령 구조곡은 철원 평야 뿐만 아닌 많은 곳이 용암으로 매워져 있다.
백두산이 형성 되기 전에도 위에 설명한 이유로 인해 마그마가 열극 분화 한 것으로 추정되며, 직경 100KM가 넘는 광범위한 지역을 모두 매워버릴 정도로 대규모로 마그마가 분화하였다. 이는 추가령 화산과는 차원을 달리하는 규모이다. 하지만 일대가 모두 용암으로 채워졌음에도 백두산에서는 여전히 화산활동이 활발하게 일어났다.
분화의 형태도 변하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하와이처럼 열극을 통한 뜨거운 마그마 분화가 일어났지만 온도가 내려가고 점성이 증가하면서 중심분화로 전환됐다. 이 과정에서 망천아 화산체가 형성되었고, 2백만년 후에는 지금의 천지와 포태산에서 새로운 중심분화가 시작되었다.
천지와 포태산은 망천아보다 용암 온도가 낮고 점성이 더 높아, 후지산과 같은 성층화산체 혹은 종상 화산이 형성되었다. 더불어 이러한 화산체들은 성장할 수록 병의 마개 역할을 하여 후기로 갈 수록 화산 활동은 격렬해졌다.
위의 내용을 종합하면, 백두산은 열점, BMW, 단층 활동 등, 모든 것이 복합적으로 작용하여 형성된 난해하고 어려운 화산이다. 하와이와 같은 단순한 열점의 상승류로만은 설명이 절대 불가능하다.
또한 백두산 초기 분화의 경우, 그 순상 화산체 형성에 100만년도 채 안걸렸으며, 이는 하와이 화산보다 훨씬 빠른 성장 속도이다. 이 때문에 초기 백두산지에는 아주 작지만 열점 풀름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나 해당 지역은 두꺼운 대륙 지각이기에 압력으로 터져나오지 못하다가, 인도판이 유라시아와 충돌하여 단층이 형성되자 그 틈으로 풀름이 터져나왔을 것이다. 그렇게 일대가 용암으로 채워지자 하방 압력이 강해져 열점의 상승류는 느려지고, 백두산의 마그마 챔버에 도달한 마그마는 온도가 더욱 낮아지며 그럴 수록 점성도 강해졌을 것이다.
그런데 하방 압력이 강해질 수록 어째서 마그마의 온도가 내려갈까? 보통 압력이 강해지면 온도가 올라간다고 생각하겠지만, 백두산은 초기와 다르게 순상 화산체와 성층 화산체들이 건설되고, 아래로 짓누르는 압력이 강해질수록 열점 상승류는 속도가 느려지기 시작했다. 느려진 만큼 정체된 시간에 마그마는 주변 암석과 열교환을 하는 시간이 많아진다. 그 말은 즉슨 마그마의 온도가 내려간다는 뜻이다.
그렇게 후기 백두산 화산체가 두꺼워 질 수록 화산 활동은 격렬해져, 초기의 화산활동과는 완전히 다른 양상의 화산활동이 진행되게 된 것으로 추측된다. 두개의 거대 성층 화산체가 추가로 형성되었고, 그럴 수록 압력은 더 강해져 용암의 온도는 내려가 점성 또한 더욱 강해져 후기 화산 활동은 매우 격렬하게 진행되어 현재에 이르렀다.
위 동영상은 BMW 이론으로 백두산을 설명하는 영상이다. 지질학적으로 독특한 위치 역시 화산학계의 연구 대상이다. 기존의 판구조론으로도, 플룸 구조론으로도 설명하기 어려운 위치에 이렇게 큰 화산이 존재하는 것이다. 화산학자들이 달려들어 연구한 끝에 여러 가지 획기적인 발견을 하였다. 동아시아 지역의 지질학에 관심이 있다면 주의 깊게 살펴볼 만한 영상. 이 기사에 백두산의 구조에 대해 설명이 있으니 참조하자.
BMW 이론은 백두산 분화의 동력이 서태평양판의 섭입 때문이라는 주장이다. 태평양판은 일본 아래로 400 km 지점까지 섭입된다. 그리고 한반도 아래에서 수평으로 섭입 방향이 바뀐다. 수평이동 하던 태평양판이 백두산 부근에서 정체되고, 판에서 탈수 증상이 일어나기 시작한다. 높은 압력 때문에 탈수된 물이 주변의 암석과 뒤섞여 마그마가 되어 천천히 상승한다. 그리고 그것이 백두산의 마그마 방으로 공급된다는 이론이다. 그러나 이 이론에는 약점이 존재한다. 첫 번째로 백두산의 마그마는 태평양판에서 공급되는데, 같은 기원인 일본의 화산들과는 마그마 성분이 너무나 다르다는 것이다. 두 번째로 왜 백두산 아래에서 탈수 현상이 일어나는가이다. 세 번째로 위와 같은 이유라면 백두산의 화산활동은 수천만 년 동안 지속되었어야 했는데 백두산이 형성되기 시작한 것은 500만 년 전이다.
오창환 전북대 교수는 이러한 문제들에 대해 새로운 의견을 제시했다. 한반도 화산들은 태평양판의 섭입이 아닌 인도판의 아시아 충돌로 인한 것이라고 설명한 것이다. 동해가 갈라진 것도 인도판의 충돌 영향이기에 울릉도와 그 주변 해저 화산 또한 인도판의 충돌 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 백두산의 경우를 보자면 인도판의 충돌로 동아시아 지각에 엄청난 에너지가 전달된다. 그로 인해 수많은 단층이 형성되었고 곳곳에 에너지가 응집되었다. 인도판과 유라시아 판의 충돌은 계속되고 있기에 그 에너지는 계속 모이고 모인다. 그리고 어느 순간 임계점을 넘어 그 에너지가 화산의 형태로 분출된다는 것이다. 이 설명은 백두산은 물론 추가령 화산, 만주와 몽골의 여러 화산들의 생성 원인을 설명할 수 있다.
그러나 백두산을 이해하기 위해선 오창환 교수의 설명으로는 부족하다. 만주와 추가령 구조곡의 화산들은 단층에 의한 침식이 화산 활동으로 복구 되자 활동이 아주 약해지거나 사실상 정지되었지만, 백두산은 그렇지 않았기 때문이다.
백두산에도 미샨 푸순 단층이라는 거대 단층이 존재한다. 초기 백두산이 형성되기 전, 단층과 하천의 발달로 급격한 침식이 일어나 반작용으로 상승류가 유발했다고 추정된다. 이는 추가령 구조곡의 화산과 비슷하다. 참고로 서울 경기를 지나가는 추가령 구조곡엔 화산이 없다. 이는 평지 지역으로 오히려 퇴적 현상이 일어나 압력이 일정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산지를 지나는 단층은 침식이 빠르게 일어나 상승류가 일어나기 쉽다. 이 때문에 강원도 산지를 지나가는 추가령 구조곡은 철원 평야 뿐만 아닌 많은 곳이 용암으로 매워져 있다.
백두산이 형성 되기 전에도 위에 설명한 이유로 인해 마그마가 열극 분화 한 것으로 추정되며, 직경 100KM가 넘는 광범위한 지역을 모두 매워버릴 정도로 대규모로 마그마가 분화하였다. 이는 추가령 화산과는 차원을 달리하는 규모이다. 하지만 일대가 모두 용암으로 채워졌음에도 백두산에서는 여전히 화산활동이 활발하게 일어났다.
분화의 형태도 변하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하와이처럼 열극을 통한 뜨거운 마그마 분화가 일어났지만 온도가 내려가고 점성이 증가하면서 중심분화로 전환됐다. 이 과정에서 망천아 화산체가 형성되었고, 2백만년 후에는 지금의 천지와 포태산에서 새로운 중심분화가 시작되었다.
천지와 포태산은 망천아보다 용암 온도가 낮고 점성이 더 높아, 후지산과 같은 성층화산체 혹은 종상 화산이 형성되었다. 더불어 이러한 화산체들은 성장할 수록 병의 마개 역할을 하여 후기로 갈 수록 화산 활동은 격렬해졌다.
위의 내용을 종합하면, 백두산은 열점, BMW, 단층 활동 등, 모든 것이 복합적으로 작용하여 형성된 난해하고 어려운 화산이다. 하와이와 같은 단순한 열점의 상승류로만은 설명이 절대 불가능하다.
또한 백두산 초기 분화의 경우, 그 순상 화산체 형성에 100만년도 채 안걸렸으며, 이는 하와이 화산보다 훨씬 빠른 성장 속도이다. 이 때문에 초기 백두산지에는 아주 작지만 열점 풀름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나 해당 지역은 두꺼운 대륙 지각이기에 압력으로 터져나오지 못하다가, 인도판이 유라시아와 충돌하여 단층이 형성되자 그 틈으로 풀름이 터져나왔을 것이다. 그렇게 일대가 용암으로 채워지자 하방 압력이 강해져 열점의 상승류는 느려지고, 백두산의 마그마 챔버에 도달한 마그마는 온도가 더욱 낮아지며 그럴 수록 점성도 강해졌을 것이다.
그런데 하방 압력이 강해질 수록 어째서 마그마의 온도가 내려갈까? 보통 압력이 강해지면 온도가 올라간다고 생각하겠지만, 백두산은 초기와 다르게 순상 화산체와 성층 화산체들이 건설되고, 아래로 짓누르는 압력이 강해질수록 열점 상승류는 속도가 느려지기 시작했다. 느려진 만큼 정체된 시간에 마그마는 주변 암석과 열교환을 하는 시간이 많아진다. 그 말은 즉슨 마그마의 온도가 내려간다는 뜻이다.
그렇게 후기 백두산 화산체가 두꺼워 질 수록 화산 활동은 격렬해져, 초기의 화산활동과는 완전히 다른 양상의 화산활동이 진행되게 된 것으로 추측된다. 두개의 거대 성층 화산체가 추가로 형성되었고, 그럴 수록 압력은 더 강해져 용암의 온도는 내려가 점성 또한 더욱 강해져 후기 화산 활동은 매우 격렬하게 진행되어 현재에 이르렀다.
위 동영상은 BMW 이론으로 백두산을 설명하는 영상이다. 지질학적으로 독특한 위치 역시 화산학계의 연구 대상이다. 기존의 판구조론으로도, 플룸 구조론으로도 설명하기 어려운 위치에 이렇게 큰 화산이 존재하는 것이다. 화산학자들이 달려들어 연구한 끝에 여러 가지 획기적인 발견을 하였다. 동아시아 지역의 지질학에 관심이 있다면 주의 깊게 살펴볼 만한 영상. 이 기사에 백두산의 구조에 대해 설명이 있으니 참조하자.
높은 위도와 고도로 인해 이 산의 정상부는 한반도에서 가장 추운 곳이다. 현지 가이드들은 '백 번 올라서 두 번 천지를 보기 어렵다'고 지어졌다는 농담을 한다. 사실 고산 지역인 특성 상 구름이 끼거나 하면 보기 매우 힘든데, 아침엔 맑던 것이 정오 지나고 눈이 온다거나 하는 일이 잦다. 9월 하순부터 6월 상순까지가 겨울이며, 최한월인 1월 평균 기온은 약 -25℃, 최난월인 7월 평균 기온은 7.8℃로 시베리아와 비슷한 기온 분포를 보이고 강수량은 1,500mm 정도로 많다.
1943년 1월에는 비공식적으로 백두산 정상에서 -47.5℃가 기록된 바 있고, 1997년 1월 2일에는 비공식적으로 무려 -51.0℃가 관측되기도 했으며, 비공식이지만 백두산 정상 일원에서 -54.7℃가 기록된 적도 있다. 공식적인 한반도 역대 최저 기온은 1933년 1월 13일 평안북도 중강군의 -43.6℃이다. 백두산 정상에 한정하면 한반도를 통틀어 유일하게 한대기후의 툰드라 기후에 부합하는 기온을 보이는 지역이다. 쾨펜의 분류에서는 이렇게 추우면 고산기후로 분류하지 않는다.
백두산의 날씨는 눈, 구름, 안개, 폭우, 강풍, 혹한 등이 일반적이며, 연중 변화무쌍해서 쾌청한 날씨를 찾아보기 힘들다. 그리고 6월 중하순~9월 초중순까지 약 3개월 동안만 봄/가을이며 여름 없이 추분부터 겨울로 넘어간다. 하루에도 수십 차례 기상이 급변하고 구름에다 안개로 가려져 백두산의 전경을 보기가 어렵다. 그래서 날씨 좋은 타이밍에 맞추어 백두산 천지의 모습을 보는 것은 행운이라 여길 정도다.
여름에도 갑작스럽게 기온이 낮아져 방풍복을 준비해야 한다. 기온은 연 평균 -6~8℃, 아무리 높아도 최고 18~20℃이며, 연중 눈, 비가 내리는 날이 200여 일, 연중 강풍일수는 270일이다. 겨울 날씨가 1년 중 230일이다. 6월 초까지 눈에 덮여있는 백두산 등정은 한여름 장마철보다 6월 말에서 7월 초, 8월 말에서 9월 초가 적당한 시기이다. 실제로 평양 남북정상회담 당시 문재인 대통령과 김정은 위원장 등 일행이 천지를 방문했을 때는 쾌청했으나 늦가을 날씨(!)였으며, 그 다음에 김정은이 10월 중순 천지를 다시 방문했을 때는 블리자드가 몰아치는 사진이 북한 매체에 등장 했다.
1943년 1월에는 비공식적으로 백두산 정상에서 -47.5℃가 기록된 바 있고, 1997년 1월 2일에는 비공식적으로 무려 -51.0℃가 관측되기도 했으며, 비공식이지만 백두산 정상 일원에서 -54.7℃가 기록된 적도 있다. 공식적인 한반도 역대 최저 기온은 1933년 1월 13일 평안북도 중강군의 -43.6℃이다. 백두산 정상에 한정하면 한반도를 통틀어 유일하게 한대기후의 툰드라 기후에 부합하는 기온을 보이는 지역이다. 쾨펜의 분류에서는 이렇게 추우면 고산기후로 분류하지 않는다.
백두산의 날씨는 눈, 구름, 안개, 폭우, 강풍, 혹한 등이 일반적이며, 연중 변화무쌍해서 쾌청한 날씨를 찾아보기 힘들다. 그리고 6월 중하순~9월 초중순까지 약 3개월 동안만 봄/가을이며 여름 없이 추분부터 겨울로 넘어간다. 하루에도 수십 차례 기상이 급변하고 구름에다 안개로 가려져 백두산의 전경을 보기가 어렵다. 그래서 날씨 좋은 타이밍에 맞추어 백두산 천지의 모습을 보는 것은 행운이라 여길 정도다.
여름에도 갑작스럽게 기온이 낮아져 방풍복을 준비해야 한다. 기온은 연 평균 -6~8℃, 아무리 높아도 최고 18~20℃이며, 연중 눈, 비가 내리는 날이 200여 일, 연중 강풍일수는 270일이다. 겨울 날씨가 1년 중 230일이다. 6월 초까지 눈에 덮여있는 백두산 등정은 한여름 장마철보다 6월 말에서 7월 초, 8월 말에서 9월 초가 적당한 시기이다. 실제로 평양 남북정상회담 당시 문재인 대통령과 김정은 위원장 등 일행이 천지를 방문했을 때는 쾌청했으나 늦가을 날씨(!)였으며, 그 다음에 김정은이 10월 중순 천지를 다시 방문했을 때는 블리자드가 몰아치는 사진이 북한 매체에 등장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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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두산 7월의 폭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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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유사 권 제3 제4 탑상(塔像第四) 대산오만진신(臺山五萬眞身)[19]
有名虎景者, 自號聖骨將軍. 自白頭山遊歷, 至扶蘇山左谷, 娶妻家焉, 富而無子.
이름이 호경(虎景)이라는 사람이 있어 스스로 성골장군(聖骨將軍)이라고 불렀다. 백두산(白頭山)에서부터 두루 돌아다니다가 부소산(扶蘇山)[20]의 왼쪽 골짜기에 이르러 장가를 들고 살림을 차렸는데, 집안은 부유하였으나 자식이 없었다.
고려사 권제1 세가1 고려세계[21]
玉龍記云, ‘我國始于白頭, 終于智異, 其勢水根木幹之地, 以黑爲父母, 以靑爲身. 若風俗順土則昌, 逆土則灾.’
『옥룡기(玉龍記)』[22]에서 이르기를, 우리나라(의 지형지세)는 백두산(白頭山)에서 시작하여 지리산(智異山)에서 끝나는데, 그 형세가 물이 뿌리가 되고 나무가 줄기가 되는 땅으로 흑(黑)을 부모로 삼고, 청(靑)을 몸으로 삼는다. 만약 풍속(風俗)이 땅을 따른다면 창성할 것이나, 땅을 거스른다면 재앙이 내릴 것이다.'라고 하였습니다.
고려사 권제72 지 권제26 여복(輿服)1 관복, 공민왕(恭愍王) 6년(1357) 윤9월 사천소감(司天少監) 우흥필(于必興)의 상소에서
慶源府西有長白山, 一名白頭山, 山凡三層, 其頂有大澤南流鶯鴨緑江, 北流爲蘇下江, 東流爲豆漫江.
경원부(慶源府) 서쪽에 장백산이 있는데 일명 백두산이다. 그 정상에 큰 못(大澤)을 길러서 남으로 흘러 압록강, 북으로 흘러 소하강(송화강), 동으로 흘러 두만강이 된다.
용비어천가 1권 4장의 주석
조선 국경에서 멀지 않은 산림 가운데 태백산, 즉 백두산이 구름 위에 솟아 있습니다. 이 산은 지금 왕좌를 차지하고 있는 청조(淸朝)의 시조인 한왕(汗王 누르하치)의 탄생지이기 때문에 중국에서 유명합니다. 그 산 서쪽 비탈에는 그의 옛 집이 보수되어 보존되는데, 중국인들은 그곳을 종교적 예배의 대상으로 삼습니다. 아주 먼 지방에서 경건한 순례자들이 와서는 이마가 땅에 닿도록 조아립니다.
백두산이라는 이름이 등장하는 가장 오래된 문헌은 『삼국유사』로, 신라 명주 오대산을 백두산의 줄기로 소개하는 기사가 2차례 등장한다. 『고려사』 세계와 성종 10년(981)에도 기록이 남아있다. 그 이전 기록의 경우 『삼국사기』, 『삼국유사』, 『제왕운기』에 여러 차례 등장하는 '태백산'을 지금의 백두산을 가리키는 것으로 추정하는 편이다.[24] 단군신화, 부여, 고구려를 설명하면서 '태백산'을 무대로 언급한다. 대체로 10세기 후반부터 백두산이라 불렀다고 추정하지만,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의 편지에서 보듯 19세기까지도 태백산이라는 이름이 쓰이기도 한 모양이다.
일연은 <삼국유사>에서 단군신화를 설명할 때는 환웅이 자리잡은 태백산에 '묘향산을 이른다'는 주석을 달았으나, 고구려 건국 신화 부분에서 동부여 왕 금와가 태백산 남쪽 우발수에서 유화를 만난 부분에서는 태백산에 특별한 주석을 달지 않았다. 다만 고구려=졸본부여라 하면서 졸본을 요동 인근으로 비정했는데, 지리적인 상황으로 보아 학계에서는 백두산으로 본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평안도에 있다고 나오나, 이는 태백산을 묘향산으로 추정하여 적은 것이기 때문에 부여의 실제 위치인 만주 지역하고는 맞지 않는다.
반면 이승휴의 <제왕운기>에서는 처음부터 태백산이라고만 적고 별도의 주석을 달지 않았다. 부여, 옥저, 신라[25], 고례(高禮), 예맥이 모두 단군의 자손이라고 보는 동시에, 이승휴 자신이 중국에 사신으로 갈 때 요하 근처의 무덤을 현지인들이 '부여 부마 대왕의 무덤'이라고 증언하는 것과, 요하 인근을 부여의 땅으로 기록하고 부여가 후조선[26]의 후예라고 기록한 가탐의 기록을 실어놓아 요하 일대와 백두산을 부여 영토로 추정하고 있다.
여기서 단군신화의 태백산을 일연이 묘향산이라고 주석을 단 데에는 백두산으로 바로 잡아야 한다는 설(서대석 교수의 주장), 묘향산이 불교의 성지라서 그 영향을 받았다는 설,[27] 백두산에 대한 인식이 희박해지면서 백두산 신앙의 요소가 묘향산으로 이동한 것을 반영했다는 설(최남선 주장), 고조선의 수도가 평양으로 이동하면서 오늘날의 평양 지역에 토착화되면서 변했다는 설 등이 있다. 단군 문서 참고.
북한의 평양 단군릉 발굴 및 개건과 남한 이승만 정권의 단기 사용[28], 대종교의 단군 숭배와 백두산 성역화, 단군 동상 설립 등이 한국인의 단군 숭배를 보여준다.
백두산에 관련된 신화는 한민족뿐만 아니라 만주족, 특히 청나라에서도 나타난다. 만주족의 기원 신화의 중심지 또한 백두산이며 청나라 시절 백두산은 만주족의 영산으로서 매우 특별한 대우를 받았다. 사실 백두산 주변은 고구려 시절부터 만주족의 조상인 말갈, 여진의 주요 터전 중 하나였다보니 전통적으로 한민족보다 만주족에게 훨씬 더 중요한 산이었다.
삼지연에서 바라본 백두산
조선시대 이전부터 백두산 이외에도 장백산을 혼용했다. 용비어천가에서도 장백산이라고 언급하며 '백두산'은 별칭이라 하였다. 조선왕조실록에도 장백산이 백두산보다 훨씬 더 많이 나온다. 게다가 북한 김일성장군의 노래도 첫 소절이 장백산으로 시작한다. 2007 창춘 동계 아시안 게임에서 남한 쇼트트랙 대표팀이 이 사실을 몰랐는지 중국 측 편파판정과 장백산이란 표현에 반발하여 우발적인 세리머니를 하여 중국 측과 마찰을 빚은 적이 있다. 자세한 것은 항목의 이모저모 부분을 참고할 것.
중국에서는 산해경의 기록에선 불함산(不咸山)으로, 이후 위진남북조 시대(221∼589)에는 태백산(太白山), 도태산(徒太山) 등 여러 이명으로 불렸다. 현대에는 '장백산(長白山: 창바이산)'이라고 통일되었는데, 이는 만주어로 '긴 흰 산', '큰 흰 산'이라는 뜻인 '골민 샹갼 알린(Golmin Šanggiyan Alin)'[29]을 번역차용한 것으로, 요나라·금나라 시기부터 쓴 이름이다. 이러한 명칭은 9개월 가까이 눈이 쌓인 특색 있는 산정의 모습을 잘 반영했다.
이 만주어 명칭은 조선 영조 때 학자인 식산(息山) 이만부(李萬敷)의 지행록(地行錄)에 '가이민 상견 아린(歌爾民 商堅 我隣)'이란 음차로도 기록되어 있다. 음차일 뿐인데 굳이 한자의 훈을 억지로 끼워 맞춘 해석인 '그곳 백성(爾民)이나 장사꾼(商)이 노래하는(歌) 굳센(堅) 우리(我) 이웃(隣) 산'이란 말이 웹상에 떠돌지만, 이는 지행록 역자의 오류인 듯. 지리지인 성경통지(盛京通志)에도 "'歌爾敏(가이민←골민)'은 '크다(≒길다)'는 뜻이고 '商堅(상견←샹기얀)'은 '희다'는 말이며 '阿隣(아린←알린)'은 '산'을 말하는 만주어"라고 설명했다.
즉 현대 중국이 사용하는 '장백산'이라는 표현은 한족(漢族)의 용어가 아니다. '장백산', '백산'은 고려, 조선에서 백두산을 지칭하여 사용한 명칭이기도 하다. 10세기 무렵부터는 중국에서 대부분 장백산, 백산이라는 명칭이 많이 사용되었다. 이 시기 고려에서도 장백산이라는 명칭으로 많이 불렀고 조선시대에도 이어졌다. 지금의 백두산이라는 명칭은 그 이전에도 쓰이긴 했지만 조선 말기에나 들어서야 그 사용 빈도가 높아진다.
일본 NHK에서 북한 측의 협력을 얻어 백두산 일대의 식생을 50분짜리 자연 다큐멘터리로 담아낸 적이 있는데, 여기서 볼 수 있는 백두산은 그야말로 '희고 긴 산'이다. 남한측 미디어에서 대개 백두산 천지를 그려내는 데 비해 이 다큐는 삼지연 일대의 자연을 담고 있어서 밑에서 올려다보는 백두산의 모습이 보이기 때문.
영어권에서는 백두산이란 이름을 중국식으로 읽어서 'Baitou Mountain'이라고 하기도 한다. 일단 공식 표기는 북한의 표기인 Mt. Paektu.
한편 백두산의 가장 높은 봉우리는 병사봉(兵使峰)이나, 북한에서는 이를 장군봉이라고 부른다. 장군봉이라는 작명을 한 사람은 김정일로 알려져 있다. 1963년 8월 백두산 방문 때 백두산 최고봉 이름이 병사봉임을 알고 '수령님은 백두산이 낳은 장군님이신데 제일 높은 봉우리가 병사봉일 수가 있나? 장군봉으로 고치라' 고 말했다는 일화가 전해진다. 기사(아시아경제) 즉, 장군봉은 김일성 우상화를 반영한 명칭이므로 차후 통일되면 봉우리 이름 원복 문제가 제기될 것이다.
항간에는 원래 이름이 장군봉이었는데 일제가 민족의 기를 꺾을 목적으로 병사봉으로 고쳤다는 설이 있으나 이건 낭설이다. 왜냐하면 백두산의 병사봉의 이름은 병사(兵士)가 아니라, 지금의 사단장-군단장 급에 해당하는 조선시대 병마절도사(兵馬節度使)의 준말인 '병사(兵使)'에서 유래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김정일은 병사봉의 뜻도 모르고 잘못된 트집을 잡아[30] 봉우리 이름을 고친 것이다.
다만 일제가 이 봉우리 이름을 고쳤던 것 자체는 사실이다. 병사봉을 다이쇼 천황의 연호 다이쇼(大正, 대정)를 따서 대정봉으로 개명했던 전적이 있으나, 이 이름은 남북 어디에서도 더 이상 쓰이지 않는 이름이다.#
항간에는 원래 이름이 장군봉이었는데 일제가 민족의 기를 꺾을 목적으로 병사봉으로 고쳤다는 설이 있으나 이건 낭설이다. 왜냐하면 백두산의 병사봉의 이름은 병사(兵士)가 아니라, 지금의 사단장-군단장 급에 해당하는 조선시대 병마절도사(兵馬節度使)의 준말인 '병사(兵使)'에서 유래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김정일은 병사봉의 뜻도 모르고 잘못된 트집을 잡아[30] 봉우리 이름을 고친 것이다.
다만 일제가 이 봉우리 이름을 고쳤던 것 자체는 사실이다. 병사봉을 다이쇼 천황의 연호 다이쇼(大正, 대정)를 따서 대정봉으로 개명했던 전적이 있으나, 이 이름은 남북 어디에서도 더 이상 쓰이지 않는 이름이다.#
한민족과 만주족의 영산으로, 지금도 대한민국의 국가와[31] 북한의 국가에[32] 모두 등장한다. 백두산을 영산으로 중요시함은 상당히 오래되었다. 삼국유사에는 오대산을 설명하며 "이 산은 곧 백두산의 큰 줄기로, 각 대에는 진신이 늘 있는 곳이다."(#)라고 기록한 부분이 있어 이미 신라 때부터 한반도 산줄기의 근본 기준이자 신앙대상으로서 백두산을 꽤 중시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현행교과서상으로 고려 왕조 당시에는 말갈/여진의 땅이었기 때문에, '아주 멀리 있는 산맥의 기원'이라는 의미 이외에는 크게 주목받지 못하였다. 다만 고려사 묘청열전 인종 9년(1131)조에 묘청이 건의하여 서경(평양시)에 팔성당(八聖堂)을 세웠는데, 거기서 호국 백두악 태백선인 실덕 문수사리보살(護國白頭嶽太白仙人實德文殊師利菩薩)이라는 신격을 모셨다는 기록이 있고, 12세기 중엽 고려 의종 대에 쓰인 편년통록(編年通錄)에 왕건의 조상인 호경이 백두산으로부터 내려왔다는 내용이 있으므로, 한동안 백두산이 자국의 기원과 관련된 중요한 산이라는 인식이 퍼지기도 했다.
조선 시대 초에는 태종 14년(1414) 이전 어느 시점부터 제사 지낸 것을 이어받아 중사(中祀)로 제사를 지내기도 했으나(태종실록 14년 8월 신유), 세종 19년(1437) 자국 영토에 있지 않다고 하여(기록) 제사 대상에서 제외했다(세종실록 19년 3월 계묘). 이후에도 조선은 '백두산 자체는 우리 땅이 아니긴 한데, 백두산 남쪽은 당연히 우리 땅이고 조선의 산맥은 백두산에서 기원함'이라는 식으로 의미를 부여했다. 이런 인식을 가장 잘 체계화한 책이 신경준의 산경표인데, 이 책에서부터 '백두대간'이라는 말이 확립되었다.
이후 영조 37년(1761)부터 백두산이 조선 산맥의 근본이 된다는 이유로 제사를 지내자는 건의가 올라오기도 했지만, 검토 단계에서 숙종 때 청이 목극등을 보내 확정한 경계가 백두산으로부터 남쪽이라는 이유로 백두산 대신 백두산 맞은 편에서 백두산을 바라보며 제사를 지내기로 하였다(영조실록 43년[1767] 윤7월 신축).
이때 영조의 발언은 굉장히 정치적이다. 목극등이 지은 경계선 이야기를 다 듣고도 '용비어천가 보니까 우리 조상님(이안사) 집이 경흥에 있었다는데 거기 백두산 근처 아니냐? 야 아무리 봐도 백두산 우리 땅 같은데? 야 그럼 우리 땅이니까 제사 지내야지?' 하는 식으로 이야기를 몰아갔다. 물론 두만강 하구에 있는 경흥은 백두산과는 300km 가까이 떨어졌으니 시작부터 뭔가 이상한 소리. 당연히 조선에 청나라에 맞서 이 지역의 영유권을 주장할 의지가 있었다기보다는, 칭제건원 얘기가 나올 정도였던 이 무렵 조선 내부의 고양된 분위기에 맞춰 백두산 남쪽 국경지대의 처우를 높여준 것에 가깝다. 실제로 이 발언과 무관하게 백두산 망제를 지내는 장소는 백두산 남쪽의 녹반치(綠礬峙)로 정했다.
이후 1880년대부터 이른바 간도 지역을 두고 영유권 분쟁이 벌어지면서 백두산 인근 지역에 대해서도 관심이 높아졌다. 1897년 대한제국이라고 칭제건원하면서 황제국의 전례에 따라 오악(五岳)을 설정할 때에 백두산을 북악으로 지정하여 공식적으로 제사를 지내는 영산으로 삼았다.
현재는 북한과 중국이 절반씩 나눠서 관리한다. 중국에서는 중국5A급여유경구로 지정하였다. 그래서인지 입장료는 125위안으로 비싸다.
그러나 현행교과서상으로 고려 왕조 당시에는 말갈/여진의 땅이었기 때문에, '아주 멀리 있는 산맥의 기원'이라는 의미 이외에는 크게 주목받지 못하였다. 다만 고려사 묘청열전 인종 9년(1131)조에 묘청이 건의하여 서경(평양시)에 팔성당(八聖堂)을 세웠는데, 거기서 호국 백두악 태백선인 실덕 문수사리보살(護國白頭嶽太白仙人實德文殊師利菩薩)이라는 신격을 모셨다는 기록이 있고, 12세기 중엽 고려 의종 대에 쓰인 편년통록(編年通錄)에 왕건의 조상인 호경이 백두산으로부터 내려왔다는 내용이 있으므로, 한동안 백두산이 자국의 기원과 관련된 중요한 산이라는 인식이 퍼지기도 했다.
조선 시대 초에는 태종 14년(1414) 이전 어느 시점부터 제사 지낸 것을 이어받아 중사(中祀)로 제사를 지내기도 했으나(태종실록 14년 8월 신유), 세종 19년(1437) 자국 영토에 있지 않다고 하여(기록) 제사 대상에서 제외했다(세종실록 19년 3월 계묘). 이후에도 조선은 '백두산 자체는 우리 땅이 아니긴 한데, 백두산 남쪽은 당연히 우리 땅이고 조선의 산맥은 백두산에서 기원함'이라는 식으로 의미를 부여했다. 이런 인식을 가장 잘 체계화한 책이 신경준의 산경표인데, 이 책에서부터 '백두대간'이라는 말이 확립되었다.
이후 영조 37년(1761)부터 백두산이 조선 산맥의 근본이 된다는 이유로 제사를 지내자는 건의가 올라오기도 했지만, 검토 단계에서 숙종 때 청이 목극등을 보내 확정한 경계가 백두산으로부터 남쪽이라는 이유로 백두산 대신 백두산 맞은 편에서 백두산을 바라보며 제사를 지내기로 하였다(영조실록 43년[1767] 윤7월 신축).
이때 영조의 발언은 굉장히 정치적이다. 목극등이 지은 경계선 이야기를 다 듣고도 '용비어천가 보니까 우리 조상님(이안사) 집이 경흥에 있었다는데 거기 백두산 근처 아니냐? 야 아무리 봐도 백두산 우리 땅 같은데? 야 그럼 우리 땅이니까 제사 지내야지?' 하는 식으로 이야기를 몰아갔다. 물론 두만강 하구에 있는 경흥은 백두산과는 300km 가까이 떨어졌으니 시작부터 뭔가 이상한 소리. 당연히 조선에 청나라에 맞서 이 지역의 영유권을 주장할 의지가 있었다기보다는, 칭제건원 얘기가 나올 정도였던 이 무렵 조선 내부의 고양된 분위기에 맞춰 백두산 남쪽 국경지대의 처우를 높여준 것에 가깝다. 실제로 이 발언과 무관하게 백두산 망제를 지내는 장소는 백두산 남쪽의 녹반치(綠礬峙)로 정했다.
이후 1880년대부터 이른바 간도 지역을 두고 영유권 분쟁이 벌어지면서 백두산 인근 지역에 대해서도 관심이 높아졌다. 1897년 대한제국이라고 칭제건원하면서 황제국의 전례에 따라 오악(五岳)을 설정할 때에 백두산을 북악으로 지정하여 공식적으로 제사를 지내는 영산으로 삼았다.
현재는 북한과 중국이 절반씩 나눠서 관리한다. 중국에서는 중국5A급여유경구로 지정하였다. 그래서인지 입장료는 125위안으로 비싸다.
1980년대까지는 해외여행 가기가 힘들었다. 당시 냉전 체제로 인해 북한은 말할 것도 없고, 북한과 함께 적국으로 인식하던 중국을 거쳐 백두산에 가는 것은 꿈 같은 일이었다. 하지만 1980년대 후반부터 해외여행이 자유로워지고, 1988 서울 올림픽을 계기로 중국과 민간 교류를 시작하면서 일부 민간 단체들을 중심으로 제한된 백두산 관광이 시작되었다. 1990년대 초반 냉전이 완전히 끝나고 대한민국과 중국이 수교하면서 일반인들도 중국을 통해 백두산 관광을 할 수 있게 되었다. 특히 이 시기에 제작된 칠성사이다 CF에서 백두산 비룡폭포, 천지 등의 모습을 보여주면서, 국민들이 백두산에 대한 관심을 많이 가져 백두산 관광 붐이 일어나기도 했다.
백두산은 관광 지역이기 이전에 엄연히 중국과 북한의 국경 지대이다. 방문 빈도가 높은 천지 구역에 대하여 북한은 영유권을 주장하지 않고 있다. 조중변계조약으로 천지의 반절은 중국령으로 되어 있다. 그래서 대한민국 국민이 중국을 통해서 자유로운 관광여행이 가능한 것이다.
국가보안법에는 '국가의 존립·안전이나 자유 민주적 기본 질서를 위태롭게 한다는 점을 알면서 반국가단체의 지배하에 있는 지역으로부터 잠입하거나 그 지역으로 탈출한 자는 10년 이하의 징역에 처한다' 라고 되어 있지만, 북한 실효지배 지역을 거쳐서 등산을 하더라도 국가의 존립·안전이나 자유민주적 기본 질서를 위태롭게 한다고는 볼 수 없기 때문에 이를 기소한 적은 없다.
천지 구역은 북한과 국경으로 정확히 절반으로 갈리기 때문에, 정상 및 천지 부분에서 지정된 경로 및 구역 외에 함부로 이탈을 하는 것은 금지되어 있으며, 정상 부근에 파견 나간 중국 공안들의 통제도 꽤 심하다. 남한인이 백두산 정상 및 천지에서 태극기를 펼치거나 애국가나 아리랑 등의 민족적 색채가 짙은 노래를 부르는 행위는 금지된다. 관광지임에도 불구하고 단순한 사진 촬영조차 상당한 통제를 받는데, 중국 당국으로부터 사전에 정식으로 촬영허가를 받은 특수한 경우 말고는 일반적으로 백두산 천지 및 정상의 풍경을 담는 사진 촬영은 인물을 포함하는 기념사진 촬영의 범주에서만 허락된다.
일요일 일요일 밤에의 이경규가 간다에서 이경규가 남북통일을 염원하기 위해 한라산 백록담에서 퍼온 물을 백두산 천지에 담기 위해 백두산을 방문한 적이 있는데, 아쉽게도 산행 장면은 방송되지 못하고, 천지에 올라가 백록담 물을 천지에 쏟아 부은 장면만 방송되었다. 이건 관광용 카메라로 촬영되었다. 한라산 등정 때와는 달리 사방이 안개로 자욱해서 산의 모습은 좀처럼 보이지 않는다.
이후 1박 2일에서 예능 프로그램 최초로 백두산 촬영허가를 따냈는데, 이를 준비하기 위해 6개월 이상을 소비해야 했을 정도다. 멤버들이 독도, 가거도, 우도, 백령도 바닷물을 가져가서 뿌렸다. KBS가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신뢰성 있는 공영 방송 기관임에도 불구하고 이 정도 걸린 것을 보면, 중국 당국에서 상당히 까다롭게 심사를 하는 듯하다. 아무래도 중국 입장에서는 국경 지대로서 보안상 예민하게 관리해야 할 부분도 있을 것이고, 백두산 영토 문제와 관련하여 발생할 주변국과의 역사인식 충돌 및 마찰 등을 사전에 차단하려고 하는 느낌도 강하다. 하지만 현지 유학생 등 개인 관광객의 경우 중국 대도시 관광객과 외관상 별 차이가 없다 보니 그냥 넘어가기도 하는 모양이다.
중국 땅을 거쳐 가는 경우 이런 불편함과 눈칫밥을 감수해야 하다보니, 2000년대 초중반 북한과의 교류가 많았을 때는 북한을 통해 백두산을 가보자는 목소리들도 많이 나왔다. 당시 남한 정부에서 북한과 함께 금강산 관광에 이어서 북한 삼지연공항행 항공편을 통한 백두산 관광 사업을 추진하기도 했으나,# 실무적인 문제 및 수익성 검토 등으로 인해 차일피일 미뤄지다가, 금강산 관광을 갔던 관광객을 북한군 초병이 사살하는 박왕자 씨 피살사건으로 논의가 무산됨은 물론 금강산 관광조차 중단되어 버려 결국 북한을 통한 백두산 관광은 구체적으로 거론하지 못했다.
2002년 당시 KBS1에서 태조 왕건의 후속작으로 방영되었던 제국의 아침의 경우 북한의 협조를 얻어 북한 방면으로 백두산에 올라 천지를 바라보면서 왕요(최재성)와 왕소(김상중) 형제가 대화를 나누는 장면을 촬영할 수 있었다. 두 배우 모두 백두산에서의 촬영에 대한 소회가 남달랐다고 후기를 남겼는데, 촬영 당시 현지가 무려 영하 40도에 강풍도 상당히 불어서 특수방한복으로도 견디기 어려웠으며, 백두산 정상까지 오르기 위해 촬영팀이 눈밭에 방송장비를 짊어진 채 8km를 걷기도 했다.#
대한적십자사의 헌혈 기준에서 북한 지역 중 유일하게 여행시에도 헌혈이 가능한 지역이다.
2020년 1월 24일 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19 확산 예방의 일환으로 일시적으로 영업 중단을 한다고 밝혔다.#
백두산은 관광 지역이기 이전에 엄연히 중국과 북한의 국경 지대이다. 방문 빈도가 높은 천지 구역에 대하여 북한은 영유권을 주장하지 않고 있다. 조중변계조약으로 천지의 반절은 중국령으로 되어 있다. 그래서 대한민국 국민이 중국을 통해서 자유로운 관광여행이 가능한 것이다.
국가보안법에는 '국가의 존립·안전이나 자유 민주적 기본 질서를 위태롭게 한다는 점을 알면서 반국가단체의 지배하에 있는 지역으로부터 잠입하거나 그 지역으로 탈출한 자는 10년 이하의 징역에 처한다' 라고 되어 있지만, 북한 실효지배 지역을 거쳐서 등산을 하더라도 국가의 존립·안전이나 자유민주적 기본 질서를 위태롭게 한다고는 볼 수 없기 때문에 이를 기소한 적은 없다.
천지 구역은 북한과 국경으로 정확히 절반으로 갈리기 때문에, 정상 및 천지 부분에서 지정된 경로 및 구역 외에 함부로 이탈을 하는 것은 금지되어 있으며, 정상 부근에 파견 나간 중국 공안들의 통제도 꽤 심하다. 남한인이 백두산 정상 및 천지에서 태극기를 펼치거나 애국가나 아리랑 등의 민족적 색채가 짙은 노래를 부르는 행위는 금지된다. 관광지임에도 불구하고 단순한 사진 촬영조차 상당한 통제를 받는데, 중국 당국으로부터 사전에 정식으로 촬영허가를 받은 특수한 경우 말고는 일반적으로 백두산 천지 및 정상의 풍경을 담는 사진 촬영은 인물을 포함하는 기념사진 촬영의 범주에서만 허락된다.
일요일 일요일 밤에의 이경규가 간다에서 이경규가 남북통일을 염원하기 위해 한라산 백록담에서 퍼온 물을 백두산 천지에 담기 위해 백두산을 방문한 적이 있는데, 아쉽게도 산행 장면은 방송되지 못하고, 천지에 올라가 백록담 물을 천지에 쏟아 부은 장면만 방송되었다. 이건 관광용 카메라로 촬영되었다. 한라산 등정 때와는 달리 사방이 안개로 자욱해서 산의 모습은 좀처럼 보이지 않는다.
이후 1박 2일에서 예능 프로그램 최초로 백두산 촬영허가를 따냈는데, 이를 준비하기 위해 6개월 이상을 소비해야 했을 정도다. 멤버들이 독도, 가거도, 우도, 백령도 바닷물을 가져가서 뿌렸다. KBS가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신뢰성 있는 공영 방송 기관임에도 불구하고 이 정도 걸린 것을 보면, 중국 당국에서 상당히 까다롭게 심사를 하는 듯하다. 아무래도 중국 입장에서는 국경 지대로서 보안상 예민하게 관리해야 할 부분도 있을 것이고, 백두산 영토 문제와 관련하여 발생할 주변국과의 역사인식 충돌 및 마찰 등을 사전에 차단하려고 하는 느낌도 강하다. 하지만 현지 유학생 등 개인 관광객의 경우 중국 대도시 관광객과 외관상 별 차이가 없다 보니 그냥 넘어가기도 하는 모양이다.
중국 땅을 거쳐 가는 경우 이런 불편함과 눈칫밥을 감수해야 하다보니, 2000년대 초중반 북한과의 교류가 많았을 때는 북한을 통해 백두산을 가보자는 목소리들도 많이 나왔다. 당시 남한 정부에서 북한과 함께 금강산 관광에 이어서 북한 삼지연공항행 항공편을 통한 백두산 관광 사업을 추진하기도 했으나,# 실무적인 문제 및 수익성 검토 등으로 인해 차일피일 미뤄지다가, 금강산 관광을 갔던 관광객을 북한군 초병이 사살하는 박왕자 씨 피살사건으로 논의가 무산됨은 물론 금강산 관광조차 중단되어 버려 결국 북한을 통한 백두산 관광은 구체적으로 거론하지 못했다.
2002년 당시 KBS1에서 태조 왕건의 후속작으로 방영되었던 제국의 아침의 경우 북한의 협조를 얻어 북한 방면으로 백두산에 올라 천지를 바라보면서 왕요(최재성)와 왕소(김상중) 형제가 대화를 나누는 장면을 촬영할 수 있었다. 두 배우 모두 백두산에서의 촬영에 대한 소회가 남달랐다고 후기를 남겼는데, 촬영 당시 현지가 무려 영하 40도에 강풍도 상당히 불어서 특수방한복으로도 견디기 어려웠으며, 백두산 정상까지 오르기 위해 촬영팀이 눈밭에 방송장비를 짊어진 채 8km를 걷기도 했다.#
대한적십자사의 헌혈 기준에서 북한 지역 중 유일하게 여행시에도 헌혈이 가능한 지역이다.
2020년 1월 24일 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19 확산 예방의 일환으로 일시적으로 영업 중단을 한다고 밝혔다.#
중국 쪽에서 걸어서 올라가는 코스. 산행을 하려면 이 코스가 좋다.
백두산 서파 시작 지점에서 표를 산 후 지프차 또는 버스를 통해 오를 수 있다.
중국에서도 생태여행 코스로 개발하여, 보존된 원시림(금강대협곡)을 볼 수 있다고 한다. 서파 코스는 대체로 완만하여 지프차 또는 버스에서 내려 청석봉 아래 37호 경계비가 있는 천지에 40여 분이면 오를 수 있다. 낮고 완만한 경사의 계단 1441개를 올라가야 한다. 여기에는 천지에서 청석봉까지 오르는 코스와 북파까지 종주하는 코스가 있다.
서파 코스에는 서파 37호 조중 경계비와 그 주변 경치, 경계선 등 볼 거리가 많다. 이 코스는 남한에서 유일하게 통일부의 허락 없이 남한인들이 북한이 실효지배하는 이북 땅을 밟을 수 있게끔 하는 기회가 주어지는 곳이라고 하는데, 등산객들이 조중경계비인 서파 37호 근방의 몇백 미터 북한 량강도 삼지연 땅을(이북5도에서는 함경남도 혜산군 보천면) 밟을 수 있다. 즉, 남한 국민으로서 위험하지 않고, 합법적으로 북한 땅을 밟을 수 있는 방도이다. 또 다른 방법은 판문점 견학. 휴전선에 걸친 군사 정전 위원회 건물 견학시 북한 쪽 출입문만 폐쇄하고 내부는 자유롭게 돌아다닐 수 있기 때문에 북한 땅을 밟아볼 수 있다.
하지만 2018년 6월 기준 경계비를 넘어갈 수 없도록 철제 울타리를 설치해 놓은 상태다. 하지만 대개 백두산 여행 상품들은 북한 접경 지대 관광도 포함하고 있기 때문에, 백두산 관광은 북한을 상당히 가까이서 경험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35]
백두산 서파 시작 지점에서 표를 산 후 지프차 또는 버스를 통해 오를 수 있다.
중국에서도 생태여행 코스로 개발하여, 보존된 원시림(금강대협곡)을 볼 수 있다고 한다. 서파 코스는 대체로 완만하여 지프차 또는 버스에서 내려 청석봉 아래 37호 경계비가 있는 천지에 40여 분이면 오를 수 있다. 낮고 완만한 경사의 계단 1441개를 올라가야 한다. 여기에는 천지에서 청석봉까지 오르는 코스와 북파까지 종주하는 코스가 있다.
서파 코스에는 서파 37호 조중 경계비와 그 주변 경치, 경계선 등 볼 거리가 많다. 이 코스는 남한에서 유일하게 통일부의 허락 없이 남한인들이 북한이 실효지배하는 이북 땅을 밟을 수 있게끔 하는 기회가 주어지는 곳이라고 하는데, 등산객들이 조중경계비인 서파 37호 근방의 몇백 미터 북한 량강도 삼지연 땅을(이북5도에서는 함경남도 혜산군 보천면) 밟을 수 있다. 즉, 남한 국민으로서 위험하지 않고, 합법적으로 북한 땅을 밟을 수 있는 방도이다. 또 다른 방법은 판문점 견학. 휴전선에 걸친 군사 정전 위원회 건물 견학시 북한 쪽 출입문만 폐쇄하고 내부는 자유롭게 돌아다닐 수 있기 때문에 북한 땅을 밟아볼 수 있다.
하지만 2018년 6월 기준 경계비를 넘어갈 수 없도록 철제 울타리를 설치해 놓은 상태다. 하지만 대개 백두산 여행 상품들은 북한 접경 지대 관광도 포함하고 있기 때문에, 백두산 관광은 북한을 상당히 가까이서 경험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35]
북한에서만 오를 수 있는 코스. 그렇기 때문에 대한민국 국민은 상술한 대로 2004년 KBS 대하드라마 제국의 아침 출연진 및 제작진, 2018년 평양 남북정상회담 당시 방북한 대통령 내외와 수행원들을 제외하면 아무도 이 코스를 가지 못했다. 반대로 통일되면 여권 없이 오를 수 있는 유일한 코스가 되긴 하지만(...)
백두산 최고봉인 장군봉을 넘어가는 코스로, 북한에서 관광용으로 적극적으로 개발했다. 차량으로 이동 가능한 산 중턱부터 정상쪽인 향도봉(망천후)까지는 지상궤도열차 "향도봉호"가 있고 이후 향도봉에서 천지까지는 케이블카 "천지삭도"가 연결되어 있어서 쉽게 오를 수 있다.
지상궤도열차 향도봉호는 1989년에 설치되어 2km 구간을 운행하고 있다. 케이블카 천지삭도는 오스트리아에서 만든 것으로 1995년에 설치되어 1.3km 구간을 운행하고 있다. 케이블카 하나에 4명이 탑승할 수 있고, 왕복에 7분 정도 소요된다고 한다.
백두산 최고봉인 장군봉을 넘어가는 코스로, 북한에서 관광용으로 적극적으로 개발했다. 차량으로 이동 가능한 산 중턱부터 정상쪽인 향도봉(망천후)까지는 지상궤도열차 "향도봉호"가 있고 이후 향도봉에서 천지까지는 케이블카 "천지삭도"가 연결되어 있어서 쉽게 오를 수 있다.
지상궤도열차 향도봉호는 1989년에 설치되어 2km 구간을 운행하고 있다. 케이블카 천지삭도는 오스트리아에서 만든 것으로 1995년에 설치되어 1.3km 구간을 운행하고 있다. 케이블카 하나에 4명이 탑승할 수 있고, 왕복에 7분 정도 소요된다고 한다.
2024년 3월, 중국이 조중변계조약에 따라 실효 지배중인 북쪽 지역의 세계지질공원 등재가 임박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북한 역시 이전에 자국이 지배하는 남쪽 부분을 신청했으나 코로나 봉쇄로 시찰단이 못 가서 중단된 상태이다. 그런데 중국 측에서는 지질공원의 이름을 '창바이산(장백산) 지질 공원'으로 등록하여, 한국에서 명칭에 따른 우려를 표하는 기사가 많이 나왔다.
이어서 2024년 3월 28일, 백두산이 '창바이산(장백산)'이란 명칭으로 세계지질공원에 공식 등재되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이와 관련하여 북한의 행보나 반응은 알려지지 않았다.
이어서 2024년 3월 28일, 백두산이 '창바이산(장백산)'이란 명칭으로 세계지질공원에 공식 등재되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이와 관련하여 북한의 행보나 반응은 알려지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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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에서는 37,473번째로 높은 산이다.[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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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은 2019년 12월 2일 김정은이 측근들과 군마를 타고 백두산에 오른 것을 계기로 '백두산지구 혁명전적지 답사행군'을 시작했는데, 이 행군은 11월 말부터 다음해 3월 말까지[38] 삼지연시에 있는 김정일 동상 앞에서 출발해 삼지연시 무봉노동자구에 있는 왕재산대기념비 앞에서 끝이 난다. 참고자료 북한은 이 행군을 '사상무장'에 쓰고 있는데,[39] 특히 북한은 "백두의 칼바람 맛을 알면 혁명가가 되고 그것을 모르면 배신자가 된다" "손발이 시리고 귀뿌리를 도려내는 듯한 추위도 느껴보아야 선열들의 강인성, 투쟁성, 혁명성을 알 수 있고 백두의 혁명 전통을 대를 이어 빛내어갈 맹세를 다질 수 있다"면서 백두산 행군을 강조하고 있는데, 2019년부터 2023년까지 4년 동안 2400여 단체, 총 12만 명이 행군에 참여했다고 하는데, 행군 참여자 중에는 기관 간부, 근로자, 교사, 대학생도 있지만 절대다수가 고등학생 같은 청소년이라고 한다. #1 #2 더 충격적인 것은 행군에 따라 여성과 중학생도 행군에 참여하는 경우도 있다는 것. #
다만 북한답게(...) 행군 환경도 열악하여 단체복과 식비 등 답사에 필요한 물품과 비용을 모두 자비로 해결해야 하는 데다가 숙소도 난방이 되지 않아 새우잠을 자야 하고, 식사도 제대로 보장되지 않는다. 게다가 동상이라도 입으면 치료 비용도 자체로 부담해야 하는데, 심지어 행군을 이끄는 일꾼 측에서는 동상 치료는커녕 "젊어서 고생 금 주고도 못 산다" "젊었을 때 코도 얼고 발도 얼어봐야 사람이 된다"면서 아무런 치료도 하지 않고 그저 대열에서 떨어지지 말 것만 지시했다고 한다. # 심지어 학생이나 일반주민 행군대는 열악한 환경에서 죽도록 고생을 하는데 당 간부, 권력기관 간부들로 조직된 행군대는 든든한 방한장비와 따뜻한 숙소, 좋은 식사를 보장받는다는 주장도 있다. 보상이라고 해봤자 입당, 대학 입학에 가산점이 되는 것밖에 없는데, 의외로 북한에서는 교통 인프라도 발달하지 않고 국내 여행도 허가를 받아야 가능하기에 어느 정도 여유 있는 사람들이 먼 장거리를 여행할 수 있다며 좋아하는 경우도 있는 모양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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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한 노래에서 상당히 자주 사용되는 지명이기도 하다. 관련 문서에서 설명하듯이 대한민국 애국가에도 나오며, 육군가, 홀로 아리랑 등에서도 언급된다. 원숭이 엉덩이는 빨개라는 구전 동요에도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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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 알려지지는 않았지만 중국에서는 백두산 부석이 유명하다. 북한도 이를 아는지 헐값에 팔아서 중국 내에서 건축자재로 쓰인다. 주로 946년 백두산 분화 때 분출된 부석이 쌓인 것인데, 백두산 주변에는 이때 분출된 부석이 20~30 m 두께로 쌓여있을 정도로 그 양이 어마어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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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 8월, 지린성 옌볜 조선족자치주 안도현 바이허(白河)촌 인근 산속에서 주민이 배수로를 수리하던 중 '창바이산(長白山) 인삼'이라고 적힌 비석이 발견됐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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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두산과 관련된 이야기로는 <백두산 이야기>라는 어린이용 동화책이 있다. 내용은 세상이 만들어지면서 맑고 가벼운 기운은 하늘이 되었고 탁하고 무거운 기운이 땅이 되면서 사람과 동물, 식물들이 탄생했고 사람들은 조선[41]이라는 나라를 세웠다. 그러나 해와 달이 두 개씩 있어 살기 힘들었고 이를 본 천지왕은 조선 백성들을 도울 자가 없냐는 물음에 흑두거인이 자신이 해결하겠다며 나섰다가 실패하고 이후 백두거인이 화살로 해와 달 각각 하나를 떨어뜨려서 해결한다. 그렇게 조선 백성들이 행복하게 살고 있을 때 백두거인을 시기하던 흑두거인이 외국의 군대를 이끌고 조선을 침략한다. 이에 천지왕은 백두거인에게 당장 조선 땅에 내려가서 흑두거인을 물리치고 영원히 조선 백성들과 함께하라는 명령을 내리자 백두거인은 흑두거인과 싸우게 되고 100일이 넘는 싸움 끝에 백두거인이 승리했다[42]. 이를 본 조선 백성들은 사기가 올라 외국 군대를 물리쳤다. 싸움이 끝나자 백두거인은 조선 백성들에게 너희를 영원히 지켜주고 위험에 빠지면 다시 깨어나겠다고 말 하고 백두산이 되었고 그 후 조선에 가뭄이 들자 폭발과 함께 비를 내려 가뭄을 해결해 주었다. 이에 조선 백성들은 백두산은 영원히 자신들을 지켜줄 거라는 확신을 가지며 끝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