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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하천
인더스 강 دریائے سندھ | Indus rive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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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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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00k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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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역면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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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65,500km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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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원지 근처의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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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상류 : 펀자브 지역. 5갈래의 하천들 중 본류는 가장 서쪽을 흐른다. 젤룸, 라비, 술테즈 강과 차례대로 합류한 체납 강이 우치 부근에서 인더스 본류와 합류한다. 파키스탄의 주요부. 1960년 인도의 자와할랄 네루 총리와 파키스탄의 아윱칸 대통령은 카라치에서 인더스 강물 조약 (IWT)을 체결하여 강들의 물 관리 문제에 합의하였다. 그 결과 서쪽 강들인 인더스 본류, 체납, 젤룸 강은 파키스탄이 관할하고 베아스, 라비, 술테즈 강은 인도가 관리하기로 합의하여 분리 독립 후 이어지던 양국 간의 수자원 확보 전쟁은 일단락되었다. 관리국은 관리하는 강의 물 80%를 점유하고, 20%는 상대국에 보낸다. 하지만 강들의 상류를 점유한 인도가 파키스탄 대홍수 시에 수문을 개방하는 등의 행보를 보여 파키스탄이 반발하고 있다.
일찍이 개발되었으며 하류 주변의 토지는 비옥하지만 연간 강수량이 500mm 이하이고 기후 또한 건조한 아열대기후이기 때문에 기근이 잦았다. 위성 지도를 보면 녹음이 가득한 갠지스 강 유역과 달리 (펀잡 아래의) 인더스 강 동쪽에는 거대한 타르 사막이 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인더스 강은 크게 북쪽의 펀자브와 남쪽의 신드 지방으로 구분할 수 있고, 간다라나 카슈미르 지방에도 걸쳐 있다. 인더스 문명기 강을 따라 모헨조다로, 하라파, 돌라비라 등의 도시가 세워진 선진 지역이다. 전통적으로 인더스는 페르시아 / 유목 문명과 인도 문명의 접점이었다.
아케메네스 제국, 셀레우코스 왕조, 파르티아, 사산 제국이 인더스 강 서안까지 영토를 영유하였고 알렉산드로스 대왕 역시 인더스 강까지 원정한 후 돌아갔다. 헬레니즘기에는 인도-그리스 왕국이 세워졌었고, 백훈족 (에프탈)이나 인도-스키타이 등 유목 세력이 지배하기도 하였다. 종교적으로는 고대에는 불교, 중세 초엽에는 힌두교가 번성하였다. 그러다 8세기 초엽 신드 지방이 우마이야 왕조령이 되었고, 10-12세기에는 술탄 마흐무드와 무함마드 고리 등 튀르크-아프간계 왕조들이 힌두쿠시 산맥을 넘어 남하하며 이슬람화가 시작되었다.
13-18세기에는 델리 술탄국과 무굴 제국이 펀자브의 라호르를 중심으로 세워져 이슬람화가 가속화되었고, 18세기에 이르면 인더스 강 유역의 주민 2/3 이상이 무슬림이었다. 17세기 들어 펀자브를 중심으로 신흥종교 시크교가 세력을 떨쳤고, 19세기 시크 왕국을 세웠으나 영국에 복속되었다. 이어진 인도령 영국기에 강 유역에 대규모 관개 공사가 시행되었고, 20세기에 이르러 완성한 신드의 수쿠르 댐을 통해 유역의 밀 ·목화 ·사탕수수 등의 생산을 크게 안정시켰다. 2022년 파키스탄 대홍수 시에 범람하여 큰 피해를 야기하였다.
보통 인더스강 유역이 건조해져서 아리아인들 의 공격을 못막고 문명의 쇠퇴가 일어났다는 시각이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작 아케메네스 왕조 페르시아에서 세수비중으로는 이곳이 메소포타미아+이집트를 합친 것보다 생산력이 높았다. 지금도 인더스 강 유역은 파키스탄 인구 1억명 이상을 먹여살리는 곳이며 갠지스강 유역보다도 생산력이 높다. 애초에 인도 북부는 생산력으로는 굉장히 비옥한 곳이다.
다만 인더스강 유역이 이후 역사에서 잘 부각되지 않은 이유는 기근이 자주 일어나는 것도 원인이지만 무역 루트도 그렇고 정치적 중심지에서 밀려나면서 부의 집중이 일어나지 않게 된 영향이 크다. 인더스만이 아니라 대다수 지역에서도 잘사는곳은 생산량이 높은곳이 아니라 그 생산된 부가 집중된 곳이다. 전근대 시기엔 대체로 정치적 중심지가 이 부의 집중지가 되곤 했다.
아케메네스 제국, 셀레우코스 왕조, 파르티아, 사산 제국이 인더스 강 서안까지 영토를 영유하였고 알렉산드로스 대왕 역시 인더스 강까지 원정한 후 돌아갔다. 헬레니즘기에는 인도-그리스 왕국이 세워졌었고, 백훈족 (에프탈)이나 인도-스키타이 등 유목 세력이 지배하기도 하였다. 종교적으로는 고대에는 불교, 중세 초엽에는 힌두교가 번성하였다. 그러다 8세기 초엽 신드 지방이 우마이야 왕조령이 되었고, 10-12세기에는 술탄 마흐무드와 무함마드 고리 등 튀르크-아프간계 왕조들이 힌두쿠시 산맥을 넘어 남하하며 이슬람화가 시작되었다.
13-18세기에는 델리 술탄국과 무굴 제국이 펀자브의 라호르를 중심으로 세워져 이슬람화가 가속화되었고, 18세기에 이르면 인더스 강 유역의 주민 2/3 이상이 무슬림이었다. 17세기 들어 펀자브를 중심으로 신흥종교 시크교가 세력을 떨쳤고, 19세기 시크 왕국을 세웠으나 영국에 복속되었다. 이어진 인도령 영국기에 강 유역에 대규모 관개 공사가 시행되었고, 20세기에 이르러 완성한 신드의 수쿠르 댐을 통해 유역의 밀 ·목화 ·사탕수수 등의 생산을 크게 안정시켰다. 2022년 파키스탄 대홍수 시에 범람하여 큰 피해를 야기하였다.
보통 인더스강 유역이 건조해져서 아리아인들 의 공격을 못막고 문명의 쇠퇴가 일어났다는 시각이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작 아케메네스 왕조 페르시아에서 세수비중으로는 이곳이 메소포타미아+이집트를 합친 것보다 생산력이 높았다. 지금도 인더스 강 유역은 파키스탄 인구 1억명 이상을 먹여살리는 곳이며 갠지스강 유역보다도 생산력이 높다. 애초에 인도 북부는 생산력으로는 굉장히 비옥한 곳이다.
다만 인더스강 유역이 이후 역사에서 잘 부각되지 않은 이유는 기근이 자주 일어나는 것도 원인이지만 무역 루트도 그렇고 정치적 중심지에서 밀려나면서 부의 집중이 일어나지 않게 된 영향이 크다. 인더스만이 아니라 대다수 지역에서도 잘사는곳은 생산량이 높은곳이 아니라 그 생산된 부가 집중된 곳이다. 전근대 시기엔 대체로 정치적 중심지가 이 부의 집중지가 되곤 했다.
언어별 명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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دریائے سندھ (다리야이 신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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سنڌو درياھ (신두 다리야)[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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دریاۓ سندھ (다리야 신드)[샤무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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ਸਿੰਧ ਦਰਿਆ (시다 다리야)[구르무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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सिन्धु (sindhu, 신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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सिन्धु नदी (신두 나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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رود سِند (루드 신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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نهر السند (나흐르 앗-신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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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آباسن (아바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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སེང་གེ།་གཙང་པོ (셍게 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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Инд (인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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Ινδός ποταμός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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Ἰνδός (Indos, 인도스)(고전 그리스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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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Indus (Riv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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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nd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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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 Rio Hindu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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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ông Ấn / 滝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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インダ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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印度河Yìndùhé, 印度斯河Yìndùsī H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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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더스 강 (Indus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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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더스 강이라는 이름은 산스크리트어 신두(सिन्धु, sindhu)에서 나왔는데 이 자체가 강이라는 의미이다. 황하의 河, 장강의 江과 어원이 유사한 셈. 더불어 이 신두라는 이름이 페르시아, 고대 그리스를 거쳐 유럽으로 전해지면서 나라 이름 India의 유래가 되었고, 한자문화권에도 전해져서 인도라는 이름으로 정착했다. 그러나 인도 제국의 서북부가 파키스탄으로 독립한 이후 인더스 강 본류의 대부분은 인도를 지나지 않는다. 상류 극히 일부분[5]과 몇 개의 지류만이 인도와 파키스탄의 분쟁지역인 카슈미르를 지날 뿐이다.[6]
그외에 라다크와 티베트에서는 '사자의 강'이란 의미인 셍게 참포라 부르고, 길기트 발티스탄에서는 겜트수 혹은 추포라 부른다. 파슈툰인들은 닐랍 / 셰르다리야로도 부른다. 신디어로는 신두와 함께 메흐란, 푸랄리, 사무다르 등으로도 부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