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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수의 한 종류인 초계국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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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우리말로는 '국수'라고 하며 한자어로는 '면'(麵)이라고 한다.
동남방언으로는 '국시'라고 한다.('안동건진국시' 등) 그래서 예전 개그로 "국수와 국시의 차이는? - 국수는 밀가루로 만들고 국시는 밀가리로 맹근다."라는 우스갯소리가 있었다. # # 경상도와 직접적인 관련은 없지만 고려인들이 만들어 먹는 국수 요리도 국시(кукси)라고 부른다.
한국어로 국수는 넓은 뜻으로는 면류 전반을, 좁은 뜻으로는 한국 면요리의 일종인 잔치국수만을 의미한다. 그러나 이는 휴전선 이남의 한반도, 그 중에서도 경기도와 삼남 지방에만 해당되는 이야기이고, 전통적으로 강원도와 이북 지방, 간도, 연해주 등에서는 메밀로 만든 막국수나 냉면 형태의 면 요리를 국수라고 부른다. 함경도의 전통음식 농마국수나 러시아, 중앙아시아 지역 고려인들이 만들어 먹는 국시(кукси) 등이 그 예시.
중국에서는 밀가루 면만 麵[1](면/miàn/몐)이라고 부르며, 쌀가루로 만들어진 면은 粉(분/fěn/펀)이라고 부른다.[2] 그래서 이 사실을 모르는 한국인들이 중국에 갔을 때 아무리 봐도 겉으로는 몐으로 보이는 펀 사진을 보고 이 면 요리 달라고 하면 중국 종업원이 "이건 몐이 아니라 펀이라고 펀!" 이라며 실랑이하는 모습을 가끔 볼 수 있다. 현지인 입장에선 면과 분이 구분되는 다른 것이기 때문에 비유하자면 짜장면 사진에 대고 짜장밥 달라는 식이니까 재확인을 안 할 수가 없다. 문제는 밀가루 면과 쌀가루 면의 겉모습 차이가 그다지 없어서 헷갈리기 쉽다는 점. 쌀국수는 米线(미셴)이라고도 한다. 그래도 웬만하면 대충 알아듣고 알아서 가져온다.
일본에서는 麺(めん)이라고 하지만, 본래 메밀을 뜻하던 '소바'가 워낙에 국수로 자주 만들어지다 보니 오키나와 소바, 중화 소바 같이 메밀 이외의 재료로 만든 국수를 '소바'라고 하는 경우도 있다.
동남방언으로는 '국시'라고 한다.('안동건진국시' 등) 그래서 예전 개그로 "국수와 국시의 차이는? - 국수는 밀가루로 만들고 국시는 밀가리로 맹근다."라는 우스갯소리가 있었다. # # 경상도와 직접적인 관련은 없지만 고려인들이 만들어 먹는 국수 요리도 국시(кукси)라고 부른다.
한국어로 국수는 넓은 뜻으로는 면류 전반을, 좁은 뜻으로는 한국 면요리의 일종인 잔치국수만을 의미한다. 그러나 이는 휴전선 이남의 한반도, 그 중에서도 경기도와 삼남 지방에만 해당되는 이야기이고, 전통적으로 강원도와 이북 지방, 간도, 연해주 등에서는 메밀로 만든 막국수나 냉면 형태의 면 요리를 국수라고 부른다. 함경도의 전통음식 농마국수나 러시아, 중앙아시아 지역 고려인들이 만들어 먹는 국시(кукси) 등이 그 예시.
중국에서는 밀가루 면만 麵[1](면/miàn/몐)이라고 부르며, 쌀가루로 만들어진 면은 粉(분/fěn/펀)이라고 부른다.[2] 그래서 이 사실을 모르는 한국인들이 중국에 갔을 때 아무리 봐도 겉으로는 몐으로 보이는 펀 사진을 보고 이 면 요리 달라고 하면 중국 종업원이 "이건 몐이 아니라 펀이라고 펀!" 이라며 실랑이하는 모습을 가끔 볼 수 있다. 현지인 입장에선 면과 분이 구분되는 다른 것이기 때문에 비유하자면 짜장면 사진에 대고 짜장밥 달라는 식이니까 재확인을 안 할 수가 없다. 문제는 밀가루 면과 쌀가루 면의 겉모습 차이가 그다지 없어서 헷갈리기 쉽다는 점. 쌀국수는 米线(미셴)이라고도 한다. 그래도 웬만하면 대충 알아듣고 알아서 가져온다.
일본에서는 麺(めん)이라고 하지만, 본래 메밀을 뜻하던 '소바'가 워낙에 국수로 자주 만들어지다 보니 오키나와 소바, 중화 소바 같이 메밀 이외의 재료로 만든 국수를 '소바'라고 하는 경우도 있다.
한국어에서 '분식'(粉食)은 본래 밀가루로 만든 음식을 지칭했고 많은 면 요리가 분식에 속했다. 오늘날에는 분식의 의미가 변화해 분식집이라고 면 요리를 특별히 더 많이 팔지는 않는다.
국수 가게를 '면옥'(麪屋/麵屋)이라고도 부르지만, 라면이나 짜장면처럼 각각 분식집, 중국집의 범주에 속한다면 면옥이라고 부르지 않는다.[3] 오늘날에는 주로 냉면 전문점만 면옥이라고 부르는데, 일제강점기 당시 서울 시내에 가장 번성했던 면 전문점이 바로 냉면집이기 때문이다.[4] 중국집의 경우 식사부 외에 요리부도 겸해서 '청요릿집'이라는 명칭이 따로 있었고, 분식집은 1960년대 이후 정부의 분식장려 정책으로 생겼다.
국수 가게를 '면옥'(麪屋/麵屋)이라고도 부르지만, 라면이나 짜장면처럼 각각 분식집, 중국집의 범주에 속한다면 면옥이라고 부르지 않는다.[3] 오늘날에는 주로 냉면 전문점만 면옥이라고 부르는데, 일제강점기 당시 서울 시내에 가장 번성했던 면 전문점이 바로 냉면집이기 때문이다.[4] 중국집의 경우 식사부 외에 요리부도 겸해서 '청요릿집'이라는 명칭이 따로 있었고, 분식집은 1960년대 이후 정부의 분식장려 정책으로 생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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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 메소포타미아 지방에서 최초로 국수를 만들어 먹었다고 추정한다. 그러나 항아리에서 발견된 면 형태의 음식은 이집트에서도 발견된지라 발상지는 북부 아프리카라는 설도 있다. 인류의 시작이 아프리카인걸 감안하면 인류의 시작과 함께했을 전통요리일지도 모른다.
밀은 인류 농경 역사 극초기부터 함께해온 작물이지만 점질단백의 함량이 높아 호화(糊化,gelatinization)가 어렵고 거친 껍질을 분리하기도 어려워 가루내어 섭취하는것이 기본이 되었다. 이 가루를 물에 개어 그대로 구워내면 빵(무교병, 혹은 교병)이 되고 반죽 모양을 먹기좋게 가공하면 거기서부터 제면이 시작되는 것이다. 메밀을 비롯 다른 재료로 만들어낸 국수들은 밀가루면의 어레인지이거나 밀가루를 구하지 못해 대체재료로 만들어진 것이다. 온전한 독자발생이라고 하면 중남미의 옥수수 수제비 정도다.
인류 최고(最古) 문명 발상지와 가까운 중앙아시아 지역에서 가장 오래된 국수를 발굴하였다. 밀은 쌀과 달리 6~7겹의 질긴 껍질을 벗기고 빻아 밀가루를 채취하기까지 상당한 기술과 노동력이 필요하다. 반면 기온과 습도가 높은 아시아에서는 밀 대신 쌀을 주로 재배했다. 쌀은 노동집약적이면서 밀보다 산출량이 많아 더 많은 인구를 부양할 수 있다. 서쪽으로 퍼진 것은 최초의 국수와 가까운 형태인 파스타[5], 동쪽으로 퍼진 것은 쌀국수, 탕면 등 각기 독자 형태로 발전했다. 이후 아시아 쪽에서는 꽤 널리 퍼졌지만 유럽 쪽에서는 파스타를 제외하고는 그리 널리 보편화 하지 않았다.
한국에서는 삼국 시대나 남북국 시대에 전래되어 먹었다고 추정되나 구체적인 문헌 증거는 없다. 일단 고려도경에서 식사 접대를 할 때 내온 음식 중 하나로 국수를 언급하고 있어 늦어도 고려 시대부터 먹었던 것으로 보인다. 당시에 국수는 접대는 물론 제례에서도 사용하였으며 사찰에서 만들어 팔기도 했다. 노걸대에서 '우리 고려인은 습면(濕麵)[6]을 먹는 습관이 있다'는 내용이 기록되어 있어 생각보다 일상적으로도 자주 먹은 것으로 보인다.
재료면에서는 주로 메밀을 사용하거나 밀가루를 녹두나 전분과 섞는 방식으로 면을 만들었는데 이 중 메밀로 만든 국수 종류가 가장 많았다. 보통 한반도 북부에서는 메밀을 이용한 온면이나 냉면, 막국수가 발달했고 남부 지방은 밀가루를 이용한 칼국수가 발달했다. 현재까지 문헌에서 그 모양이 구체적으로 나오는 가장 오래된 국수는 녹말로 면을 만든 녹두나화이다.[7] 당시 한반도가 중국보다는 제분기술이 발달하지 않았다 보니 밀가루가 비쌌던지라 밀가루로 만든 국수는 성인식이나 혼인식같은 귀한 잔칫날에만 먹는 고급 음식이었다.[8]
일본의 대표적인 국수라고 할 수 있는 우동은 중국에서 들어왔으며 현재 전해지는 기록과 풍속화로 미루어 밀가루를 섞은 소바는 18세기 초에 등장한다. 그 이전까지는 메밀로 국수를 만든다는 개념이 없어서 그냥 메밀가루를 호화시켜 만든 소바가키(そばがき)라는 것을 먹었다.
근대 시기에는 일본에서부터 건면 제조를 시작하였는데 이후 한국 전쟁 때 미국에게서 받은 구호품으로 밀가루가 대량으로 풀린 이후 일반화되었다. 제2차 세계 대전이 끝나고 유럽의 농업이 정상화 할 때까지 오래 걸리리라고 여겨 밀가루를 대량으로 생산해 두었었는데 생각보다 빨리 정상화 하여 남아 돌던 밀가루가 한국, 일본까지 유입된 것이다. 이 때 원래대로라면 메밀로 만들던 냉면을 밀가루로 만들어 밀면이 탄생하는 등 새로운 면 국수요리가 생겼다. 그 당시엔 쌀이 부족했으니 비교적 싼 수입산 밀가루로 끼니를 대신할 수 있도록 혼분식 장려 운동을 시작하며 국수 문화를 다시 보편화 하였다.
밀은 인류 농경 역사 극초기부터 함께해온 작물이지만 점질단백의 함량이 높아 호화(糊化,gelatinization)가 어렵고 거친 껍질을 분리하기도 어려워 가루내어 섭취하는것이 기본이 되었다. 이 가루를 물에 개어 그대로 구워내면 빵(무교병, 혹은 교병)이 되고 반죽 모양을 먹기좋게 가공하면 거기서부터 제면이 시작되는 것이다. 메밀을 비롯 다른 재료로 만들어낸 국수들은 밀가루면의 어레인지이거나 밀가루를 구하지 못해 대체재료로 만들어진 것이다. 온전한 독자발생이라고 하면 중남미의 옥수수 수제비 정도다.
인류 최고(最古) 문명 발상지와 가까운 중앙아시아 지역에서 가장 오래된 국수를 발굴하였다. 밀은 쌀과 달리 6~7겹의 질긴 껍질을 벗기고 빻아 밀가루를 채취하기까지 상당한 기술과 노동력이 필요하다. 반면 기온과 습도가 높은 아시아에서는 밀 대신 쌀을 주로 재배했다. 쌀은 노동집약적이면서 밀보다 산출량이 많아 더 많은 인구를 부양할 수 있다. 서쪽으로 퍼진 것은 최초의 국수와 가까운 형태인 파스타[5], 동쪽으로 퍼진 것은 쌀국수, 탕면 등 각기 독자 형태로 발전했다. 이후 아시아 쪽에서는 꽤 널리 퍼졌지만 유럽 쪽에서는 파스타를 제외하고는 그리 널리 보편화 하지 않았다.
한국에서는 삼국 시대나 남북국 시대에 전래되어 먹었다고 추정되나 구체적인 문헌 증거는 없다. 일단 고려도경에서 식사 접대를 할 때 내온 음식 중 하나로 국수를 언급하고 있어 늦어도 고려 시대부터 먹었던 것으로 보인다. 당시에 국수는 접대는 물론 제례에서도 사용하였으며 사찰에서 만들어 팔기도 했다. 노걸대에서 '우리 고려인은 습면(濕麵)[6]을 먹는 습관이 있다'는 내용이 기록되어 있어 생각보다 일상적으로도 자주 먹은 것으로 보인다.
재료면에서는 주로 메밀을 사용하거나 밀가루를 녹두나 전분과 섞는 방식으로 면을 만들었는데 이 중 메밀로 만든 국수 종류가 가장 많았다. 보통 한반도 북부에서는 메밀을 이용한 온면이나 냉면, 막국수가 발달했고 남부 지방은 밀가루를 이용한 칼국수가 발달했다. 현재까지 문헌에서 그 모양이 구체적으로 나오는 가장 오래된 국수는 녹말로 면을 만든 녹두나화이다.[7] 당시 한반도가 중국보다는 제분기술이 발달하지 않았다 보니 밀가루가 비쌌던지라 밀가루로 만든 국수는 성인식이나 혼인식같은 귀한 잔칫날에만 먹는 고급 음식이었다.[8]
일본의 대표적인 국수라고 할 수 있는 우동은 중국에서 들어왔으며 현재 전해지는 기록과 풍속화로 미루어 밀가루를 섞은 소바는 18세기 초에 등장한다. 그 이전까지는 메밀로 국수를 만든다는 개념이 없어서 그냥 메밀가루를 호화시켜 만든 소바가키(そばがき)라는 것을 먹었다.
근대 시기에는 일본에서부터 건면 제조를 시작하였는데 이후 한국 전쟁 때 미국에게서 받은 구호품으로 밀가루가 대량으로 풀린 이후 일반화되었다. 제2차 세계 대전이 끝나고 유럽의 농업이 정상화 할 때까지 오래 걸리리라고 여겨 밀가루를 대량으로 생산해 두었었는데 생각보다 빨리 정상화 하여 남아 돌던 밀가루가 한국, 일본까지 유입된 것이다. 이 때 원래대로라면 메밀로 만들던 냉면을 밀가루로 만들어 밀면이 탄생하는 등 새로운 면 국수요리가 생겼다. 그 당시엔 쌀이 부족했으니 비교적 싼 수입산 밀가루로 끼니를 대신할 수 있도록 혼분식 장려 운동을 시작하며 국수 문화를 다시 보편화 하였다.
국수는 매우 익숙한 음식이지만, 역사가 깊은 만큼 다양한 변형이 생겨서 그것을 정의하는 범위가 워낙 포괄적이라 무엇을 국수라고 하는지 정의하기는 생각만큼 쉽지 않다. 일반적으로 곡물 가루[9]를 원료로 만든 주재료에 수프(간을 한 국물)[10]를 더해 먹는 음식을 면류로 정의한다.
통상 우동/라면/짬뽕같이 밀가루로 만든 길쭉한 면발의 주재료에 묽은 국물을 더한 형태를 전형적인 면류로 생각한다. 수제비/떡국같이 주재료의 모양이 일반적인 면발 모양이 아니어도 면류이고, 짜장면/스파게티같이 국물의 점도가 높은 것들도 면류이다. 위의 정의에 따르면 모양도 면발이 아니고 국물의 점도도 높은 떡볶이도 면류라고 할 수 있다. [11]
면에 속을 넣은 것, 즉 만두, 라자냐 등이 국수, 면에 들어가느냐는 찬반 양론이 맞서는 논쟁 거리이다. 예를 들어 페이스북의 국내 면 동호인들은 만두, 교자, 라자냐 등 소가 들어간 것도면으로 쳐 주자는 쪽이 우세하다. 이탈리아의 파스타에는 속이 들어가는 것이나 좁쌀 모양으로 만든 것까지 들어간다.
통상 우동/라면/짬뽕같이 밀가루로 만든 길쭉한 면발의 주재료에 묽은 국물을 더한 형태를 전형적인 면류로 생각한다. 수제비/떡국같이 주재료의 모양이 일반적인 면발 모양이 아니어도 면류이고, 짜장면/스파게티같이 국물의 점도가 높은 것들도 면류이다. 위의 정의에 따르면 모양도 면발이 아니고 국물의 점도도 높은 떡볶이도 면류라고 할 수 있다. [11]
면에 속을 넣은 것, 즉 만두, 라자냐 등이 국수, 면에 들어가느냐는 찬반 양론이 맞서는 논쟁 거리이다. 예를 들어 페이스북의 국내 면 동호인들은 만두, 교자, 라자냐 등 소가 들어간 것도면으로 쳐 주자는 쪽이 우세하다. 이탈리아의 파스타에는 속이 들어가는 것이나 좁쌀 모양으로 만든 것까지 들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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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적으로 시판되는 국수(소면)를 만드는 모습. 동영상
다양한 곡물가루, 대표적으로 쌀가루 또는 밀가루에 약간의 소금을 넣고 물로 반죽하여 면을 뽑은 뒤 말린 것이다. 이러한 건면은 이탈리아의 파스타 등도 있으나, 한국의 흔히 볼 수 있는 건면국수인 소면은 밀의 종류가 다르고 모양이 다르다. 파스타 중에서도 소면과 거의 비슷한 굵기의 카펠리 단젤로(천사의 머리카락)라는 것이 있다. 하지만 파스타 종류들은 듀럼밀을 사용하는 데다, 반죽할 때 물 대신 계란을 사용하기 때문에 식감이나 풍미가 전혀 다르다.
한국의 제면법은 분틀에 반죽을 넣고 눌러서 뽑아내는 압면(押麵), 반죽을 넓게 펴서 둘둘 말고 칼로 썰어내는 절면(絶麵)으로 이분화되어 있다.[12] 중국에서는 면을 만드는 방법에 따라 이름을 달리 부른다. 밀가루 반죽을 손으로 길게 늘려 만들면 라면(拉面)[13]이라 한다. 이외에도 수공면(手工面)[14]이나 도삭면(刀削面)[15] 등도 있다.
다양한 곡물가루, 대표적으로 쌀가루 또는 밀가루에 약간의 소금을 넣고 물로 반죽하여 면을 뽑은 뒤 말린 것이다. 이러한 건면은 이탈리아의 파스타 등도 있으나, 한국의 흔히 볼 수 있는 건면국수인 소면은 밀의 종류가 다르고 모양이 다르다. 파스타 중에서도 소면과 거의 비슷한 굵기의 카펠리 단젤로(천사의 머리카락)라는 것이 있다. 하지만 파스타 종류들은 듀럼밀을 사용하는 데다, 반죽할 때 물 대신 계란을 사용하기 때문에 식감이나 풍미가 전혀 다르다.
한국의 제면법은 분틀에 반죽을 넣고 눌러서 뽑아내는 압면(押麵), 반죽을 넓게 펴서 둘둘 말고 칼로 썰어내는 절면(絶麵)으로 이분화되어 있다.[12] 중국에서는 면을 만드는 방법에 따라 이름을 달리 부른다. 밀가루 반죽을 손으로 길게 늘려 만들면 라면(拉面)[13]이라 한다. 이외에도 수공면(手工面)[14]이나 도삭면(刀削面)[15] 등도 있다.
12세기 초, 송나라의 사신인 서긍이 지은 고려도경이 한국사에서 가장 오래된 국수 기록으로 확인되므로 고려대에 면식이 한반도에 정착한 것으로 추정된다. 고려도경에 따르면, 사신이 고려 경내에 들어오면 10여종의 면식을 제공받았고 그 중에서 해산물이 진기했다, 나라 안에 밀이 부족하다보니 면 가격이 비싸 큰 잔치가 아니면 먹지 않았단 기록이 있으며, 이규보의 동국이상국집에선 고명한 세 학자가 탕병의 손님이 되었단 내용이 적혀있는데, 이는 아기가 태어난 지 사흘이 됐을 때 탕병. 즉, 국수를 먹었단 내용으로 상술한 대로 잔치요리로 사용됐음을 유추할 수 있다.
조선시대에도 대부분의 국수는 메밀로 만들었고 밀로 국수를 만드는 경우는 흔치 않았다. 음식디미방에서 알 수 있듯 양반가에서도 밀가루와 메밀가루를 섞어 칼국수를 만들었고 남부 지방에서도 안동건진국수 처럼 귀한 밀가루에 콩가루를 섞어 국수를 만들었으며[16] 왕실에서도 메밀가루로 만든 국수를 먹었다.[17] 일제강점기 때 소면이 들어오긴 했지만 '조선인들은 메밀면, 일본인들은 소면'이란 말이 나올 만큼 여전히 메밀국수가 기본이었던 것이다. 화북처럼 여름을 제외하면 건조하여 밀을 기르기 적합한 기후를 가지고 있고 실제로도 일제강점기까지도 밀을 제법 길렀던 한국에서 밀가루 국수가 발달하지 않은 이유는 상술했듯이 풍차기술 조차도 없고 수차기술발전과 지리적 입지 미흡 때문에 제분기술이 미발달했기 때문이다.
잔치국수의 유래에 대한 민간어원으로 '밀가루가 옛날에는 흔하지 않은 식품이어서 양반이나 잔치 때나 밀가루 국수를 만들어 먹어서 잔치국수가 되었다'는 이야기가 있으나 실제 조선시대 사서나 요리책을 보면 전혀 사실이 아닌 이야기다. 소면 자체가 일제강점기 무렵에 한국으로 들어온 것이며, 조선 말기에는 소면을 왜면이라고 부를 정도로 낯설어 했다. 이 민간어원설에 살이 덧붙어서 한반도 남부가 농사 짓기 좋고 양반이 많아서 남한은 밀가루 국수 음식이 많다는 이야기가 돌기도 하지만 남한의 또 다른 밀가루 국수인 칼국수 역시 정작 조선시대에는 메밀 국수가 주류였고 미군정 때 막대한 밀가루 보급 이후로 메밀 칼국수에서 밀가루 칼국수로 변한 것이라는게 중론이다. 남부에서 농사가 잘 된다는 것도 역사적 사실과는 반대이며, 밀은 겨울나기를 하며 자라는 작물이라 한반도에선 똑같은 겨울나기를 하지만 비교적 추위에 약한 보리는 남부에서 키우고 북부에서는 밀을 키워서 조선시대와 일제강점기에는 주로 황해도와 평양 인근에서 밀이 많이 났다. #
아무튼 미군정이라는 짧은 시기 동안 한반도 남부 국수 식문화는 밀가루 위주로 바뀌었고 이러한 이유로 강원도, 경기도 동부를 제외한 남한 지역에서는 국수라 하면 잔치국수 등 따뜻한 면요리를 먼저 떠올리지만 강원도 및 경기도 동부에서는 국수라 하면 막국수라는 차가운 면요리를 먼저 떠올린다. 역시 북한의 평안도, 황해도 일대에서는 국수라 하면 일반적으로 냉면을 뜻하며 함경도로 가면 농마국수를 떠올린다. 개성 및 인근 지역을 제외한 이북 지역과 강원도에서는 따듯한 국수를 '온면'(溫麪)이라고 따로 불렀지만 이남 지역의 강원도는 수도권과 빈번히 교류하여 이제는 온면을 마냥 따로 구분하지만은 않는다.
대한민국의 대표적인 전통 국수요리는 냉면, 칼국수, 막국수, 고기국수, 올챙이국수, 콩국수, 간장국수 등이 있다. 구한말과 개화기부터는 외래 문화가 유입되며 짜장면, 짬뽕, 라면, 우동 등 한국식으로 어레인지된 국수 요리 및 잔치국수, 쫄면, 밀면, 비빔국수, 잡채[18]처럼 국내에서 새롭게 만든 면요리도 생겼다. 또한 분단 이후 이남 지역은 경제력 상승으로 인해 전 세계에서 음식 문화가 유입되어 2000년대 이후로는 파스타, 쌀국수 등 이국적인 국수들도 대중들 사이에서 인기를 끈다.
조선시대에도 대부분의 국수는 메밀로 만들었고 밀로 국수를 만드는 경우는 흔치 않았다. 음식디미방에서 알 수 있듯 양반가에서도 밀가루와 메밀가루를 섞어 칼국수를 만들었고 남부 지방에서도 안동건진국수 처럼 귀한 밀가루에 콩가루를 섞어 국수를 만들었으며[16] 왕실에서도 메밀가루로 만든 국수를 먹었다.[17] 일제강점기 때 소면이 들어오긴 했지만 '조선인들은 메밀면, 일본인들은 소면'이란 말이 나올 만큼 여전히 메밀국수가 기본이었던 것이다. 화북처럼 여름을 제외하면 건조하여 밀을 기르기 적합한 기후를 가지고 있고 실제로도 일제강점기까지도 밀을 제법 길렀던 한국에서 밀가루 국수가 발달하지 않은 이유는 상술했듯이 풍차기술 조차도 없고 수차기술발전과 지리적 입지 미흡 때문에 제분기술이 미발달했기 때문이다.
잔치국수의 유래에 대한 민간어원으로 '밀가루가 옛날에는 흔하지 않은 식품이어서 양반이나 잔치 때나 밀가루 국수를 만들어 먹어서 잔치국수가 되었다'는 이야기가 있으나 실제 조선시대 사서나 요리책을 보면 전혀 사실이 아닌 이야기다. 소면 자체가 일제강점기 무렵에 한국으로 들어온 것이며, 조선 말기에는 소면을 왜면이라고 부를 정도로 낯설어 했다. 이 민간어원설에 살이 덧붙어서 한반도 남부가 농사 짓기 좋고 양반이 많아서 남한은 밀가루 국수 음식이 많다는 이야기가 돌기도 하지만 남한의 또 다른 밀가루 국수인 칼국수 역시 정작 조선시대에는 메밀 국수가 주류였고 미군정 때 막대한 밀가루 보급 이후로 메밀 칼국수에서 밀가루 칼국수로 변한 것이라는게 중론이다. 남부에서 농사가 잘 된다는 것도 역사적 사실과는 반대이며, 밀은 겨울나기를 하며 자라는 작물이라 한반도에선 똑같은 겨울나기를 하지만 비교적 추위에 약한 보리는 남부에서 키우고 북부에서는 밀을 키워서 조선시대와 일제강점기에는 주로 황해도와 평양 인근에서 밀이 많이 났다. #
아무튼 미군정이라는 짧은 시기 동안 한반도 남부 국수 식문화는 밀가루 위주로 바뀌었고 이러한 이유로 강원도, 경기도 동부를 제외한 남한 지역에서는 국수라 하면 잔치국수 등 따뜻한 면요리를 먼저 떠올리지만 강원도 및 경기도 동부에서는 국수라 하면 막국수라는 차가운 면요리를 먼저 떠올린다. 역시 북한의 평안도, 황해도 일대에서는 국수라 하면 일반적으로 냉면을 뜻하며 함경도로 가면 농마국수를 떠올린다. 개성 및 인근 지역을 제외한 이북 지역과 강원도에서는 따듯한 국수를 '온면'(溫麪)이라고 따로 불렀지만 이남 지역의 강원도는 수도권과 빈번히 교류하여 이제는 온면을 마냥 따로 구분하지만은 않는다.
대한민국의 대표적인 전통 국수요리는 냉면, 칼국수, 막국수, 고기국수, 올챙이국수, 콩국수, 간장국수 등이 있다. 구한말과 개화기부터는 외래 문화가 유입되며 짜장면, 짬뽕, 라면, 우동 등 한국식으로 어레인지된 국수 요리 및 잔치국수, 쫄면, 밀면, 비빔국수, 잡채[18]처럼 국내에서 새롭게 만든 면요리도 생겼다. 또한 분단 이후 이남 지역은 경제력 상승으로 인해 전 세계에서 음식 문화가 유입되어 2000년대 이후로는 파스타, 쌀국수 등 이국적인 국수들도 대중들 사이에서 인기를 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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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수(한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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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북아시아 한중일 삼국 중 면류가 가장 발달한 국가이다. 그 중에서도 산시성(산서성) 국수 요리가 중국에서도 유명하다.
한국, 일본은 기후 혹은 토지 운용 문제상 밀을 주식으로 삼기 힘든 곳이 많은 반면, 중국은 땅덩어리가 넓은데다 문명의 발상지인 화북이 밀농사에 적합한 기후여서[21] 수천 년간 밀가루 요리를 주식으로 삼은 지역이 많았다. 아예 서양에서 수프를 먹을 때 빵을 뜯어서 넣어서 먹는 방식과 유사하게, 끓인 양고기 탕에다가 발효되지 않은 구운 빵을 손으로 잘게 뜯어 넣어서 수저로 떠먹는 식습관도 있다. 만두에서부터 밀전병 국수[22], 빵[23] 등을 주식으로 자주 먹어왔었다.
동아시아의 국수 전파만 하더라도 중국 송나라(북송)에서 자주 먹던 국수가 동아시아 각국으로 퍼지면서 시작되었다. 한국에서 국수를 본격적으로 먹기 시작한 때는 중국 송나라로부터 면이 전파된 고려시대부터로 추정되며 일본 또한 한국과 마찬가지로 중국에게서 국수 문화와 국수와 관련된 요리 기법들을 전파받았다.
중국 국수문화는 엄청나게 다양하다. 넓은 대륙에 수많은 식재료를 결합하여 새로운 국수를 창조한다. 그 예로 중국 류저우시에는 뤄쓰펀이라 불리는 달팽이, 정확히는 우렁이 국수가 별미로 손꼽힌다. 달팽이 국수에서 나오는 특유의 향을 좋아한다고 해서 인스턴트식품으로도 개발되었다고 한다.중국 달팽이 요리 쏸라펀은 충칭시를 대표하는 음식 중 하나다.
한국, 일본은 기후 혹은 토지 운용 문제상 밀을 주식으로 삼기 힘든 곳이 많은 반면, 중국은 땅덩어리가 넓은데다 문명의 발상지인 화북이 밀농사에 적합한 기후여서[21] 수천 년간 밀가루 요리를 주식으로 삼은 지역이 많았다. 아예 서양에서 수프를 먹을 때 빵을 뜯어서 넣어서 먹는 방식과 유사하게, 끓인 양고기 탕에다가 발효되지 않은 구운 빵을 손으로 잘게 뜯어 넣어서 수저로 떠먹는 식습관도 있다. 만두에서부터 밀전병 국수[22], 빵[23] 등을 주식으로 자주 먹어왔었다.
동아시아의 국수 전파만 하더라도 중국 송나라(북송)에서 자주 먹던 국수가 동아시아 각국으로 퍼지면서 시작되었다. 한국에서 국수를 본격적으로 먹기 시작한 때는 중국 송나라로부터 면이 전파된 고려시대부터로 추정되며 일본 또한 한국과 마찬가지로 중국에게서 국수 문화와 국수와 관련된 요리 기법들을 전파받았다.
중국 국수문화는 엄청나게 다양하다. 넓은 대륙에 수많은 식재료를 결합하여 새로운 국수를 창조한다. 그 예로 중국 류저우시에는 뤄쓰펀이라 불리는 달팽이, 정확히는 우렁이 국수가 별미로 손꼽힌다. 달팽이 국수에서 나오는 특유의 향을 좋아한다고 해서 인스턴트식품으로도 개발되었다고 한다.중국 달팽이 요리 쏸라펀은 충칭시를 대표하는 음식 중 하나다.
간토 지역에서는 소바가 유명하고, 간사이 지역에서는 우동이 대표적인 국수 요리이다. 특히 소바는 에도 시대에 제면법이 완성되어 수백 년이 지난 현재까지 완성된 형태가 변하지 않은 유서 깊은 음식으로 인기가 많다.
이러한 동서 구분은 현대의 일본에서 또 다른 양태로 드러나는데, 바로 라멘의 구분이다. 가장 서쪽 끝인 하카타(후쿠오카)는 중국과 오키나와의 영향으로 돼지뼈 국물이 진한 돈코츠 라멘을, 오사카 등 간사이 지역은 소금간을 한 시오라멘, 도쿄를 비롯한 간토 지역은 우동처럼 간장을 뿌려 간하는 쇼유라멘, 그리고 홋카이도 지역은 된장을 풀어넣은 미소라멘이 주력이다.
본토 외의 지역의 국수 요리로는 오키나와의 오키나와 소바가 유명한데 본래 오키나와는 밀을 기르기에 좋지 않은 기후 때문에, 밀가루 면요리는 그리 자주 먹을 수 있는 음식은 아니었으나 1902년 나하시에서 중국인 요리사가 면요리를 만들던 것을 시작으로 오키나와 소바가 등장하여 전쟁 후 미군 원조물자로 많이 들어온 밀가루를 사용해 오키나와 소바를 만들면서 많은 오키나와 소바 음식점들이 번성하였다.
이 외에도 전후 등장한 야키소바 역시 유명하다.
이러한 동서 구분은 현대의 일본에서 또 다른 양태로 드러나는데, 바로 라멘의 구분이다. 가장 서쪽 끝인 하카타(후쿠오카)는 중국과 오키나와의 영향으로 돼지뼈 국물이 진한 돈코츠 라멘을, 오사카 등 간사이 지역은 소금간을 한 시오라멘, 도쿄를 비롯한 간토 지역은 우동처럼 간장을 뿌려 간하는 쇼유라멘, 그리고 홋카이도 지역은 된장을 풀어넣은 미소라멘이 주력이다.
본토 외의 지역의 국수 요리로는 오키나와의 오키나와 소바가 유명한데 본래 오키나와는 밀을 기르기에 좋지 않은 기후 때문에, 밀가루 면요리는 그리 자주 먹을 수 있는 음식은 아니었으나 1902년 나하시에서 중국인 요리사가 면요리를 만들던 것을 시작으로 오키나와 소바가 등장하여 전쟁 후 미군 원조물자로 많이 들어온 밀가루를 사용해 오키나와 소바를 만들면서 많은 오키나와 소바 음식점들이 번성하였다.
이 외에도 전후 등장한 야키소바 역시 유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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짬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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긴 형태 때문에 동북아시아(한국, 중국, 일본) 등지에서는 장수[26]의 의미로도 사용되며, 때문에 생일에 국수를 먹는 풍습이 있다. 한국에서 설날이나 생일에 떡국을 먹는 것도 크게 보면 떡국 자체가 긴 '가래떡'으로 만드는 것이기 때문에 국수와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27] 이러한 맥락에서 아예 아주 기다란 한 가닥으로 한 그릇을 담아내는 '일근면' 같은 조리방식도 존재한다. 중국, 일본에서는 지금도 찾아볼 수 있지만, 한국의 경우는 다소 생소한 방식인 듯.[28]
한국 냉면에선 가위로 썩둑썩둑 면을 잘라주는 서비스(?)를 시행하는데, 먹기에는 무척 편해지지만 '장수 기원'이라는 문화적 코드와는 멀어진 방식이다. 한국을 제외한 면 문화권 사람들에게 면을 가위로 자르는 행위는 충격적으로 받아들인다. 물론 국수로 장수를 기원하는 문화는 한국도 공유하는 것이지만 오늘날 한국에서 냉면에 가위질하기는 실용성 면에서 비교적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는 편이다. 라면을 끓여 먹을때 면을 부수는 사람이 많고 자른 당면이 시중에 팔리는 등 한국에서는 실용성과 장수에 대한 연관성을 구분하는 편이다.
옛날엔 생일, 결혼식 등 잔치에서 자주 만들었다고 한다. 면발의 길쭉한 생김새에서 장수하라는 좋은 의미도 있었고, 무엇보다 면이 준비되면 빠르게 요리로 만들어 다수의 하객들에게 나눠줄 수 있었기 때문이다. 중국에서도 비슷하게 생일잔치 때 장수면(長壽麵)이라고 말 그대로 장수를 기원하는 의미로 먹는다.# 이 때 주의할 점은 면이 끊어지면 안 된다는 것. 때문에 한국에 오는 중국 관광객들이 생일을 맞이해서 냉면집을 들어가 냉면을 장수면으로 먹는데, 이걸 끊을 수도 없고 다 삼킬 수도 없고 해서 곤란한 상황에 처하는 광경을 가끔 볼 수 있다.
현대는 거의 뷔페지만, 아직 많은 사람들이 남의 결혼 소식을 들으면 '국수를 먹여준다'라는 관용어를 사용한다. 상대방에게 결혼을 언제 하느냐고 묻는 이야기를 할 때 '국수는 언제 먹여줄 거냐?'라고 묻는 관습이 아직도 남아있다. 실제로도 결혼식 때는 뷔페 메뉴에 잔치국수가 빠지지 않고 잡채나 비빔국수 등으로도 국수를 제공한다. 설령 양식 풀코스를 제공한다고 할지라도 메뉴에 스파게티가 있거나 소량이나마 국수가 서빙되는 경우가 많다.
한식에선 설렁탕이나 갈비탕 등의 탕류 요리에 소면, 당면 등을 넣기도 한다. 혼분식 장려 운동의 영향이 남은 것으로 그 시절에는 특정 요일에는 밥을 취급하지 못 했으니까 궁여지책으로 밥을 내놓는 대신에 국수를 넣어서 국수요리로 팔았던 것이었다. 물론 혼분식 장려 운동이 과거의 유산이 된 이후로는 면요리로 취급될 정도로 충분한 양을 넣지는 않고, 그냥 고명 역할을 하는 정도로 넣는 것이 일반적이다.
일본에서는 이사 온 사람이 이웃에게 국수를 돌리는 문화가 있다. 그냥 국물이 있는 국수를 돌리면 불기 때문에 주로 자루소바를 돌린다. 현대에 와서는 웬만한 시골이 아니면 그냥 포장된 건면을 사다가 돌리는 것이 일반적이다. 대개 양 옆집과 맞은편 집의 3곳에 돌리며 조금 여유가 있다면 맞은편 집의 양사이드까지 5곳에 돌린다.
그 외에 몇몇 외국에서도 잔치음식으로 국수를 쓰는 경우가 종종 있다.
한국 냉면에선 가위로 썩둑썩둑 면을 잘라주는 서비스(?)를 시행하는데, 먹기에는 무척 편해지지만 '장수 기원'이라는 문화적 코드와는 멀어진 방식이다. 한국을 제외한 면 문화권 사람들에게 면을 가위로 자르는 행위는 충격적으로 받아들인다. 물론 국수로 장수를 기원하는 문화는 한국도 공유하는 것이지만 오늘날 한국에서 냉면에 가위질하기는 실용성 면에서 비교적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는 편이다. 라면을 끓여 먹을때 면을 부수는 사람이 많고 자른 당면이 시중에 팔리는 등 한국에서는 실용성과 장수에 대한 연관성을 구분하는 편이다.
옛날엔 생일, 결혼식 등 잔치에서 자주 만들었다고 한다. 면발의 길쭉한 생김새에서 장수하라는 좋은 의미도 있었고, 무엇보다 면이 준비되면 빠르게 요리로 만들어 다수의 하객들에게 나눠줄 수 있었기 때문이다. 중국에서도 비슷하게 생일잔치 때 장수면(長壽麵)이라고 말 그대로 장수를 기원하는 의미로 먹는다.# 이 때 주의할 점은 면이 끊어지면 안 된다는 것. 때문에 한국에 오는 중국 관광객들이 생일을 맞이해서 냉면집을 들어가 냉면을 장수면으로 먹는데, 이걸 끊을 수도 없고 다 삼킬 수도 없고 해서 곤란한 상황에 처하는 광경을 가끔 볼 수 있다.
현대는 거의 뷔페지만, 아직 많은 사람들이 남의 결혼 소식을 들으면 '국수를 먹여준다'라는 관용어를 사용한다. 상대방에게 결혼을 언제 하느냐고 묻는 이야기를 할 때 '국수는 언제 먹여줄 거냐?'라고 묻는 관습이 아직도 남아있다. 실제로도 결혼식 때는 뷔페 메뉴에 잔치국수가 빠지지 않고 잡채나 비빔국수 등으로도 국수를 제공한다. 설령 양식 풀코스를 제공한다고 할지라도 메뉴에 스파게티가 있거나 소량이나마 국수가 서빙되는 경우가 많다.
한식에선 설렁탕이나 갈비탕 등의 탕류 요리에 소면, 당면 등을 넣기도 한다. 혼분식 장려 운동의 영향이 남은 것으로 그 시절에는 특정 요일에는 밥을 취급하지 못 했으니까 궁여지책으로 밥을 내놓는 대신에 국수를 넣어서 국수요리로 팔았던 것이었다. 물론 혼분식 장려 운동이 과거의 유산이 된 이후로는 면요리로 취급될 정도로 충분한 양을 넣지는 않고, 그냥 고명 역할을 하는 정도로 넣는 것이 일반적이다.
일본에서는 이사 온 사람이 이웃에게 국수를 돌리는 문화가 있다. 그냥 국물이 있는 국수를 돌리면 불기 때문에 주로 자루소바를 돌린다. 현대에 와서는 웬만한 시골이 아니면 그냥 포장된 건면을 사다가 돌리는 것이 일반적이다. 대개 양 옆집과 맞은편 집의 3곳에 돌리며 조금 여유가 있다면 맞은편 집의 양사이드까지 5곳에 돌린다.
그 외에 몇몇 외국에서도 잔치음식으로 국수를 쓰는 경우가 종종 있다.
한국에서도 사찰 요리 가운데 하나로 전파되었던 듯하다. 이미 고려 시대부터 사원에서 면을 만들어 판다는 기록이 있다. 사료를 보면 절에서 방문객들을 상대로 국수를 대접했다는 기록도 볼 수가 있다.
현재도 사찰에서는 국수를 스님의 미소라는 뜻의 '승소(僧笑)'라고 하는데, 공양으로 국수 나온다고 하면 스님들이 그냥 좋아서 빙긋 웃기 때문이다.[29] 누들로드에 출연한 선재스님의 설명에 따르면 아무래도 채식 위주의 식단이라 단백질이 부족할 수 있는데, 밀가루 글루텐도 단백질이므로 본능적으로 부족한 영양소의 보충을 위해 몸이 당겨서 그런 것이 더 강하다고 한다. 더구나 옛날에 국수는 요새로 치면 패스트푸드로 격 없이 먹을 수 있는 음식이었다. 특히 스님들의 식사예절인 발우공양은 대단히 길고 복잡한 것으로 유명한데, 성진 스님에 따르면 국수가 나오면 발우공양을 하지 않는다고 한다. 당연히 면이 다 불어버릴 테니... 그래서 실제로 오늘날의 스님들도 국수를 좋아한다고 한다. 영상
일본에서는 국수를 먹을 때는 소리 내어 먹는 예절이 있는데, 일본의 엄격한 선종 사찰에서도 국수를 먹을 때만큼은 소리내서 먹는 세속의 예절을 따른다. 평상시의 엄격한 기준을 좀 풀어준다는 뜻이다.
법정 스님은 한창 국수를 좋아하던 시절이 있어서 그 때는 남들이 몇 생을 거쳐야 먹을 국수를 먹었노라고 수필에 써놓았다. 가끔씩 외출을 할 때도 국수를 먹기도 했는데, 휴게소 우동이 제일 맛이 없었다고 한다. 며칠 동안 퉁퉁 불어터진 면이 이리저리 돌아다니다가 뜨거운 국물에 잠시 척 담가져서 사람 앞에 오기 때문이라고 말했다.[30] 물론 다 그런 건 아니고 어떤 지역 휴게소 보리국수는 상당히 맛있더라고 적어놓기도 했다. 그렇게 자주 국수를 먹어왔지만 어느 순간 갑자기 물려서 암자로 국수가 들어오면 근처 사찰로 다 보내버렸다고 한다.
일본에서도 가마쿠라 시대에 중국 송나라로 유학한 승려 엔니(円爾)[31]가 국수 뽑는 기계의 설계도를 가지고 제작하기 시작하여 절에서 행사가 있을 때만 먹는 종교의례용 음식이었지만 점차 민간으로 퍼지면서 대중화가 되었다고 한다. 또한 무를 갈아 국수에 곁들어 먹는 양념으로 쓰는 식문화를 비롯해 콩으로 국물 내기, 참깨를 절구로 갈아 으깨서 식재료로 쓰는 것 등 중국으로 유학 간 일본 승려들이 중국 선종(불교)을 배우면서 중국 사찰에서 먹던 식재료들과 조리기법들을 일본으로 가져온 것에서 기원했다. 이 때문에 일본의 국수 역사에서 일본의 불교, 승려, 사찰은 빠질 수 없는 존재로서 항상 언급된다. 1236년 쿠조 미치이에(九条道家)는 교토에 토후쿠지(東福寺)를 창건하고 엔니를 초대 주지로 모셔왔는데, 지금도 토후쿠지는 엔니의 기일이 되면 아예 면을 삶아 공양을 올린다.
현재도 사찰에서는 국수를 스님의 미소라는 뜻의 '승소(僧笑)'라고 하는데, 공양으로 국수 나온다고 하면 스님들이 그냥 좋아서 빙긋 웃기 때문이다.[29] 누들로드에 출연한 선재스님의 설명에 따르면 아무래도 채식 위주의 식단이라 단백질이 부족할 수 있는데, 밀가루 글루텐도 단백질이므로 본능적으로 부족한 영양소의 보충을 위해 몸이 당겨서 그런 것이 더 강하다고 한다. 더구나 옛날에 국수는 요새로 치면 패스트푸드로 격 없이 먹을 수 있는 음식이었다. 특히 스님들의 식사예절인 발우공양은 대단히 길고 복잡한 것으로 유명한데, 성진 스님에 따르면 국수가 나오면 발우공양을 하지 않는다고 한다. 당연히 면이 다 불어버릴 테니... 그래서 실제로 오늘날의 스님들도 국수를 좋아한다고 한다. 영상
일본에서는 국수를 먹을 때는 소리 내어 먹는 예절이 있는데, 일본의 엄격한 선종 사찰에서도 국수를 먹을 때만큼은 소리내서 먹는 세속의 예절을 따른다. 평상시의 엄격한 기준을 좀 풀어준다는 뜻이다.
법정 스님은 한창 국수를 좋아하던 시절이 있어서 그 때는 남들이 몇 생을 거쳐야 먹을 국수를 먹었노라고 수필에 써놓았다. 가끔씩 외출을 할 때도 국수를 먹기도 했는데, 휴게소 우동이 제일 맛이 없었다고 한다. 며칠 동안 퉁퉁 불어터진 면이 이리저리 돌아다니다가 뜨거운 국물에 잠시 척 담가져서 사람 앞에 오기 때문이라고 말했다.[30] 물론 다 그런 건 아니고 어떤 지역 휴게소 보리국수는 상당히 맛있더라고 적어놓기도 했다. 그렇게 자주 국수를 먹어왔지만 어느 순간 갑자기 물려서 암자로 국수가 들어오면 근처 사찰로 다 보내버렸다고 한다.
일본에서도 가마쿠라 시대에 중국 송나라로 유학한 승려 엔니(円爾)[31]가 국수 뽑는 기계의 설계도를 가지고 제작하기 시작하여 절에서 행사가 있을 때만 먹는 종교의례용 음식이었지만 점차 민간으로 퍼지면서 대중화가 되었다고 한다. 또한 무를 갈아 국수에 곁들어 먹는 양념으로 쓰는 식문화를 비롯해 콩으로 국물 내기, 참깨를 절구로 갈아 으깨서 식재료로 쓰는 것 등 중국으로 유학 간 일본 승려들이 중국 선종(불교)을 배우면서 중국 사찰에서 먹던 식재료들과 조리기법들을 일본으로 가져온 것에서 기원했다. 이 때문에 일본의 국수 역사에서 일본의 불교, 승려, 사찰은 빠질 수 없는 존재로서 항상 언급된다. 1236년 쿠조 미치이에(九条道家)는 교토에 토후쿠지(東福寺)를 창건하고 엔니를 초대 주지로 모셔왔는데, 지금도 토후쿠지는 엔니의 기일이 되면 아예 면을 삶아 공양을 올린다.
말린 국수는 들고 다니기 쉽고, 잘 상하지 않는다. 이는 실크로드를 지나갈 때 최고의 장점이었다. 그리고 아무 때나 간단하게 조리해서 먹을 수 있다. 그러므로 면 요리는 예나 지금이나 최강의 패스트푸드다.
물기를 없앤 국수는 보존기간이 굉장히 길어 비상식량처럼 쓰기도 한다. 다만 삶을 때 물을 상당히 많이 소비하기 때문에 식수를 구하기 힘든 환경이라면 물의 소비를 줄이는 조리방식을 써야 한다. 부숴서 죽처럼 쒀 먹는 것이 보통. 그마저도 여의치 않으면 국수 자체를 씹어서 먹을 수도 있기는 하다. 말린 음식은 수분을 흡수해 부풀어 오르기 때문에 국수를 그대로 씹어 먹는다면 많이 먹을 경우 배탈에 주의해야 했다고. 만약 연명(?) 비슷하게 사용한다면 많이 먹지 않는 게 좋다.
옛 중국에서도 튀긴 후 말린 국수를 전투식량으로 사용했다.[32] 다만 기름에 튀기면 몇 달 못 가 산패하기 때문에 과거라면 모를까 오늘날엔 그리 좋은 방법이 아니다.[33] 애당초 튀긴 국수도 보관기간이 길다는 점보다는 자연건조로 말리는 데 시간이 며칠씩 걸리는 건면보다 생산 후 빠르게 보관, 수송할 수 있는 상태로 만들 수 있다는 장점 때문에 채택된 것이다. 현대의 라면처럼 보통은 끓는 육수에 넣어 먹었지만 급박한 상황에서는 생라면 먹듯이 생으로 먹었다.
중세의 중동에서도 튀긴 국수를 즐겨먹었는데, 중국처럼 전투식량으로 사용한게 아니라 꿀이나 조청을 입히고 견과류를 뿌려서 과자로 먹었다.
물기를 없앤 국수는 보존기간이 굉장히 길어 비상식량처럼 쓰기도 한다. 다만 삶을 때 물을 상당히 많이 소비하기 때문에 식수를 구하기 힘든 환경이라면 물의 소비를 줄이는 조리방식을 써야 한다. 부숴서 죽처럼 쒀 먹는 것이 보통. 그마저도 여의치 않으면 국수 자체를 씹어서 먹을 수도 있기는 하다. 말린 음식은 수분을 흡수해 부풀어 오르기 때문에 국수를 그대로 씹어 먹는다면 많이 먹을 경우 배탈에 주의해야 했다고. 만약 연명(?) 비슷하게 사용한다면 많이 먹지 않는 게 좋다.
옛 중국에서도 튀긴 후 말린 국수를 전투식량으로 사용했다.[32] 다만 기름에 튀기면 몇 달 못 가 산패하기 때문에 과거라면 모를까 오늘날엔 그리 좋은 방법이 아니다.[33] 애당초 튀긴 국수도 보관기간이 길다는 점보다는 자연건조로 말리는 데 시간이 며칠씩 걸리는 건면보다 생산 후 빠르게 보관, 수송할 수 있는 상태로 만들 수 있다는 장점 때문에 채택된 것이다. 현대의 라면처럼 보통은 끓는 육수에 넣어 먹었지만 급박한 상황에서는 생라면 먹듯이 생으로 먹었다.
중세의 중동에서도 튀긴 국수를 즐겨먹었는데, 중국처럼 전투식량으로 사용한게 아니라 꿀이나 조청을 입히고 견과류를 뿌려서 과자로 먹었다.
국수는 대부분 가늘고 길게 만드는데 빨리 익도록 하기 위함이다.
크게 나누자면 가느다란 소면, 굵은 중면이 있는데, 소면이 중면에 비해 더 가늘고 소면 아래로 더 가는 세면이 있고 중면도 크기가 살짝 조금 더 큰 정도지만, 중면도 어느정도 차이가 날 수 있다. 그외 면에 다른 재료를 섞은 것도 있고, 칼국수처럼 넓적하게 나온 것[34]도 있으나 기본적인 소면과 중면이 가장 흔하고 많이 쓰인다.
동네 슈퍼마켓과 마트에서는 소면을 주로 팔고 더 해야 칼국수 정도인데, 요즘은 간편식을 선호하는 추세에 밀려 특히 칼국수는 면만 파는 상품은 줄어들었다. 국수맛을 아는 사람은 세면과 중면을 소면과 구별할 텐데, 가게에서 구하지 못했으면 온라인을 뒤져 보자. 업소용 납품은 잘 되는지 메이저 브랜드도 만든다.
소면은 주로 비빔국수용으로, 중면은 잔치국수용으로 쓰인다. 다만 고깃집 잔치국수는 소면이 많이 쓰인다. 대개 마트등에서 살 수 있는 건조된 면은 세면,소면,중면 정도로 나뉜다. 소면보다 더 작은 세면의 장점은 넘기기가 쉽고 금방 삶아져서 가스불을 오래 켜두지 않아도 된다는 것이 장점. 오히려 금방 삶아지기 때문에 삶는 시간을 잘 챙겨야 한다. 소면 보다도 부서지기가 가장 쉬우니 주의. 소면과 세면의 구분은 꽤나 미묘한 수준이지만, 대단히 가느다란 형태의 국수 가락들이 보통 세면으로 취급 된다. 세 가지 면을 동시에 늘어놓고 보면 확실히 차이가 나는 편.
크게 나누자면 가느다란 소면, 굵은 중면이 있는데, 소면이 중면에 비해 더 가늘고 소면 아래로 더 가는 세면이 있고 중면도 크기가 살짝 조금 더 큰 정도지만, 중면도 어느정도 차이가 날 수 있다. 그외 면에 다른 재료를 섞은 것도 있고, 칼국수처럼 넓적하게 나온 것[34]도 있으나 기본적인 소면과 중면이 가장 흔하고 많이 쓰인다.
동네 슈퍼마켓과 마트에서는 소면을 주로 팔고 더 해야 칼국수 정도인데, 요즘은 간편식을 선호하는 추세에 밀려 특히 칼국수는 면만 파는 상품은 줄어들었다. 국수맛을 아는 사람은 세면과 중면을 소면과 구별할 텐데, 가게에서 구하지 못했으면 온라인을 뒤져 보자. 업소용 납품은 잘 되는지 메이저 브랜드도 만든다.
소면은 주로 비빔국수용으로, 중면은 잔치국수용으로 쓰인다. 다만 고깃집 잔치국수는 소면이 많이 쓰인다. 대개 마트등에서 살 수 있는 건조된 면은 세면,소면,중면 정도로 나뉜다. 소면보다 더 작은 세면의 장점은 넘기기가 쉽고 금방 삶아져서 가스불을 오래 켜두지 않아도 된다는 것이 장점. 오히려 금방 삶아지기 때문에 삶는 시간을 잘 챙겨야 한다. 소면 보다도 부서지기가 가장 쉬우니 주의. 소면과 세면의 구분은 꽤나 미묘한 수준이지만, 대단히 가느다란 형태의 국수 가락들이 보통 세면으로 취급 된다. 세 가지 면을 동시에 늘어놓고 보면 확실히 차이가 나는 편.
세계 최초의 즉석식품이자 현재도 최고의 즉석식품이다.
소화가 잘 되는 특징 탓에 가벼운 이미지가 있지만, 엄연히 정제당이기 때문에 혈당지수와 칼로리는 상당히 높으며 그런 주제에 소화속도는 빵, 떡에 비해 빠른 편이라서 금세 허기가 지기 쉬우니 주의가 필요하다. 국수만 먹기보다는 고기나 계란, 식이섬유가 많은 식품을 같이 먹는 것이 금방 허기지는 것을 방지해준다.
소화가 잘 되는 특징 탓에 가벼운 이미지가 있지만, 엄연히 정제당이기 때문에 혈당지수와 칼로리는 상당히 높으며 그런 주제에 소화속도는 빵, 떡에 비해 빠른 편이라서 금세 허기가 지기 쉬우니 주의가 필요하다. 국수만 먹기보다는 고기나 계란, 식이섬유가 많은 식품을 같이 먹는 것이 금방 허기지는 것을 방지해준다.
[세계의 면 요리 종류(접기)]
국수의 칼로리가 걱정되는 사람들을 위해 천사채, 곤약면 등 대체재가 있다.
다큐멘터리 누들로드가 국수의 역사와 전세계의 국수 문화에 대해 집중적으로 다뤘다. 여기서는 만두까지 면 요리에 넣었다.
면이 아닌 국물 그 자체를 즐기는 요리들은 국물 요리 문서에서 따로 다룬다.
다큐멘터리 누들로드가 국수의 역사와 전세계의 국수 문화에 대해 집중적으로 다뤘다. 여기서는 만두까지 면 요리에 넣었다.
면이 아닌 국물 그 자체를 즐기는 요리들은 국물 요리 문서에서 따로 다룬다.
[1] 간체로는 '面'이라고 쓴다. 원래 麪이 정자이지만 정체자 사용지역에서도 홍콩을 제외하면 麪을 쓰지 않는다. 홍콩에서도 麵이 많이 쓰인다.[2] 신 중화일미에 이와 관련된 에피소드가 있다. 유마오신의 주사 시험에서 최종 문제가 '麵否麵'(면인데 면이 아닌 것)이었다. 麵의 부수인 麥가 떨어지면 면이 아니기 때문에 결선 진출자들은 이 뜻을 알아보고 밀가루가 아닌 재료로 국수를 만들기 시작했다. 시험문제를 국수 모양이 아닌 밀가루 음식으로 해석한 탄만 빼고...[3] 간판은 면옥인데 냉면이나 잔치국수 같은 면을 안 팔거나 고기 시킬 때 후식으로만 팔아 구색만 갖추는, 실제는 고깃집인 주객 전도 이름인 가게도 꽤 있다.[4] 면옥이라는 말을 조선에서도 아예 안 쓴 건 아니지만, 주로 일본에서 보이는 명칭이다. '멘야'라고 읽는다.[5] 이미 고대 로마 시절부터 먹었을 것으로 추정할 수 있는 파스타 만드는 도구를 발굴하였다.[6] 국물에 담은 국수를 말한다.[7] 첨언하자면 한국에서 쌀이 주식인데 비해 쌀국수가 대중적이지 않았던 이유는 쌀가루에 글루텐이 없었기 때문이다. 동남아와 한반도의 기후는 상당히 다른데 고온다습한 동남아시아에서는 쌀을 이기작·삼기작으로 사계절 내내 계속 생산할 수 있는 환경이었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재배가 용이한 쌀을 이용해 국수를 만드는 법이 발전하게 되었다. 그러나 한반도에서는 술과 조청 등 쌀로 우선 제조해야 할 2차 가공품이 있었으며 한반도와 동남아의 쌀 품종이 다른 것도 한몫 했다.[8] 밀 자체는 보리와 더불어 흔한 곡식이었으나 중국만큼 수차의 보급이 원활하지 않아 절구나 연자방아 등으로 제분을 했기 때문에 밀가루 보급에 한계가 있어 밀을 제분하여 국수나 빵으로 만들기 보다는 밀 알곡을 쪄서 밀밥을 지어 먹었다.[9] 주로 밀가루를 쓰지만 때에 따라서는 쌀가루나 메밀가루를 쓰기도 한다.[10] 국물의 점도(묽은 정도)는 다양할 수 있다.[11] 사실 떡볶이 떡은 지름이 좀 작은 가래떡을 다시 먹기 좋게 자른 것이므로 제조 공정상 면이 맞다.[12] 일설에 따르면 압면은 북부, 절면은 남부에서 주로 통용되다가 6.25 사변 이후로 압면법이 남쪽으로 내려왔다고도 하나, 분틀이 삼팔선 이북에만 있던 물건도 아니라 확실치는 않다.[13] 한국의 수타면과 같다.[14] 반죽을 얇게 편 후 말아서 칼로 써는 한국식 칼국수와 비슷하다.[15] 반죽을 크고 길쭉한 덩어리로 만들어 한쪽 손과 같은 쪽 어깨에 지고 다른 손으로 칼로 스치듯 베어내어 만든다.[16] 여기에는 재래종 밀의 부족한 중력과 탄력을 보완하기 위한 것도 있다.[17] 세종실록에는 왕실에서 사용할 메밀이 부족해져 새로 할당하는 내용이 나와 있다. 메밀 사용법은 밀과 크게 다를 게 없는데, 수라상으로 메밀밥이 오르지 않았음을 감안하면 전이나 국수 말고는 사용처가 그리 많지 않았다고 추측할 수 있다.[18] 잡채 자체는 원래부터 있던 궁중 요리지만 당면을 넣기 시작한 것은 일제강점기 이후부터다.[19] 한국식 중화요리이다.[20] 인스턴트 식품이지만 거의 고유 명사처럼 될만큼 전 세계적으로 공전의 히트를 기록했다.[21] 비가 많이 오지 않고 추운 평야지대라 벼농사를 짓기 힘든 기후였기 때문이다. 하북에서는 조, 밀, 수수 등을 재배했고 그 중 가장 비중이 높았던 건 밀이었다. 화남 지방은 반대로 온난하고 비가 많아 벼농사에 적합하다. 당연히 이쪽은 쌀이 주식.[22] 국수 종류가 다양한데 일본 우동이나 소바, 한국 냉면이나 잔치국수 주듯이 그냥 큰 그릇에 하나의 면류를 주는게 아니라 면을 제각각 조그만 그릇에 조금씩 담은 다음 다양한 소스에 비벼서 먹는 방식도 존재한다.(보통 4~6가지 정도 나온다.) 요리왕 비룡에서 이것을 그리기도 했다.[23] 이미 당나라 시절부터 호식이라고 해서 이러한 면, 밀가루를 이용한 빵 등을 먹어왔다. 다만 중국에서 먹어온 빵들 중 상당수가 오늘날 생각하는 서양식 빵이 아닌 서역에서 먹어온 빵 모양과 상당히 유사하다. (특유의 넓고 납작한 빵도 중국에선 자주 먹는다.) 중국에서 오랫동안 주로 먹어왔던 대부분 빵은 서역의 빵과 비교하면 발효를 하지 않는 등 몇 가지 차이점이 있다.[24] 한국식 짜장면의 원형이다.[25] 미국식 중화요리화된 대표 메뉴, 판다 익스프레스의 대표 메뉴이기도 하다.[26] 긴 목숨. 즉, 오래 사는 것.[27] 덧붙여 동그랗게 자른 가래떡은 은편 내지는 엽전과 닮은 모양이라 조선 시대 문화에서는 돈을 상징하기도 한다. 즉 조선시대 떡국은 장수와 재물복을 바라는 의미를 담은 것이라 할 수 있다.[28] 미운우리새끼에서 김건모가 시전한 바 있다.[29] 국수 이외에 떡과 만두도 역시 승소라고 했다.[30] 실제로 휴게소 우동은 시판용 면과 국물을 미리 준비해두고 주문이 들어오면 면만 해동해서 국물에 담아서 내놓으므로 엄청 빨리 나오는데 반대급부로 맛이 뛰어나다고 보기는 어렵다.[31] 생몰 1202-1280. 사후에 쇼이치 국사(聖一国師)란 시호를 받아 일본인들에겐 이 이름으로도 유명하다. 송에서 임제종을 배워 일본으로 전했다.[32] 이러한 점은 돌아돌아 인스턴트 라면을 튀겨서 만드는 데 영향을 끼쳤다.[33] 그래서 유탕면(대표적으로 라면)의 보존 기간도 5~6개월로 짧은 편이다.[34] 이걸 칼국수라는 이름으로 파는데, 사실은 일본의 건우동면에서 온 것으로 보인다. 일본산 건우동면(건사누키 우동 등)을 사면 모양이 비슷하다.[35] 참고로 이북 지역에서 "국수"라 하면 이 평양식 물냉면을 뜻한다.
종류별 요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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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수의 한 종류인 초계국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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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우리말로는 '국수'라고 하며 한자어로는 '면'(麵)이라고 한다.
동남방언으로는 '국시'라고 한다.('안동건진국시' 등) 그래서 예전 개그로 "국수와 국시의 차이는? - 국수는 밀가루로 만들고 국시는 밀가리로 맹근다."라는 우스갯소리가 있었다. # # 경상도와 직접적인 관련은 없지만 고려인들이 만들어 먹는 국수 요리도 국시(кукси)라고 부른다.
한국어로 국수는 넓은 뜻으로는 면류 전반을, 좁은 뜻으로는 한국 면요리의 일종인 잔치국수만을 의미한다. 그러나 이는 휴전선 이남의 한반도, 그 중에서도 경기도와 삼남 지방에만 해당되는 이야기이고, 전통적으로 강원도와 이북 지방, 간도, 연해주 등에서는 메밀로 만든 막국수나 냉면 형태의 면 요리를 국수라고 부른다. 함경도의 전통음식 농마국수나 러시아, 중앙아시아 지역 고려인들이 만들어 먹는 국시(кукси) 등이 그 예시.
중국에서는 밀가루 면만 麵[1](면/miàn/몐)이라고 부르며, 쌀가루로 만들어진 면은 粉(분/fěn/펀)이라고 부른다.[2] 그래서 이 사실을 모르는 한국인들이 중국에 갔을 때 아무리 봐도 겉으로는 몐으로 보이는 펀 사진을 보고 이 면 요리 달라고 하면 중국 종업원이 "이건 몐이 아니라 펀이라고 펀!" 이라며 실랑이하는 모습을 가끔 볼 수 있다. 현지인 입장에선 면과 분이 구분되는 다른 것이기 때문에 비유하자면 짜장면 사진에 대고 짜장밥 달라는 식이니까 재확인을 안 할 수가 없다. 문제는 밀가루 면과 쌀가루 면의 겉모습 차이가 그다지 없어서 헷갈리기 쉽다는 점. 쌀국수는 米线(미셴)이라고도 한다. 그래도 웬만하면 대충 알아듣고 알아서 가져온다.
일본에서는 麺(めん)이라고 하지만, 본래 메밀을 뜻하던 '소바'가 워낙에 국수로 자주 만들어지다 보니 오키나와 소바, 중화 소바 같이 메밀 이외의 재료로 만든 국수를 '소바'라고 하는 경우도 있다.
동남방언으로는 '국시'라고 한다.('안동건진국시' 등) 그래서 예전 개그로 "국수와 국시의 차이는? - 국수는 밀가루로 만들고 국시는 밀가리로 맹근다."라는 우스갯소리가 있었다. # # 경상도와 직접적인 관련은 없지만 고려인들이 만들어 먹는 국수 요리도 국시(кукси)라고 부른다.
한국어로 국수는 넓은 뜻으로는 면류 전반을, 좁은 뜻으로는 한국 면요리의 일종인 잔치국수만을 의미한다. 그러나 이는 휴전선 이남의 한반도, 그 중에서도 경기도와 삼남 지방에만 해당되는 이야기이고, 전통적으로 강원도와 이북 지방, 간도, 연해주 등에서는 메밀로 만든 막국수나 냉면 형태의 면 요리를 국수라고 부른다. 함경도의 전통음식 농마국수나 러시아, 중앙아시아 지역 고려인들이 만들어 먹는 국시(кукси) 등이 그 예시.
중국에서는 밀가루 면만 麵[1](면/miàn/몐)이라고 부르며, 쌀가루로 만들어진 면은 粉(분/fěn/펀)이라고 부른다.[2] 그래서 이 사실을 모르는 한국인들이 중국에 갔을 때 아무리 봐도 겉으로는 몐으로 보이는 펀 사진을 보고 이 면 요리 달라고 하면 중국 종업원이 "이건 몐이 아니라 펀이라고 펀!" 이라며 실랑이하는 모습을 가끔 볼 수 있다. 현지인 입장에선 면과 분이 구분되는 다른 것이기 때문에 비유하자면 짜장면 사진에 대고 짜장밥 달라는 식이니까 재확인을 안 할 수가 없다. 문제는 밀가루 면과 쌀가루 면의 겉모습 차이가 그다지 없어서 헷갈리기 쉽다는 점. 쌀국수는 米线(미셴)이라고도 한다. 그래도 웬만하면 대충 알아듣고 알아서 가져온다.
일본에서는 麺(めん)이라고 하지만, 본래 메밀을 뜻하던 '소바'가 워낙에 국수로 자주 만들어지다 보니 오키나와 소바, 중화 소바 같이 메밀 이외의 재료로 만든 국수를 '소바'라고 하는 경우도 있다.
한국어에서 '분식'(粉食)은 본래 밀가루로 만든 음식을 지칭했고 많은 면 요리가 분식에 속했다. 오늘날에는 분식의 의미가 변화해 분식집이라고 면 요리를 특별히 더 많이 팔지는 않는다.
국수 가게를 '면옥'(麪屋/麵屋)이라고도 부르지만, 라면이나 짜장면처럼 각각 분식집, 중국집의 범주에 속한다면 면옥이라고 부르지 않는다.[3] 오늘날에는 주로 냉면 전문점만 면옥이라고 부르는데, 일제강점기 당시 서울 시내에 가장 번성했던 면 전문점이 바로 냉면집이기 때문이다.[4] 중국집의 경우 식사부 외에 요리부도 겸해서 '청요릿집'이라는 명칭이 따로 있었고, 분식집은 1960년대 이후 정부의 분식장려 정책으로 생겼다.
국수 가게를 '면옥'(麪屋/麵屋)이라고도 부르지만, 라면이나 짜장면처럼 각각 분식집, 중국집의 범주에 속한다면 면옥이라고 부르지 않는다.[3] 오늘날에는 주로 냉면 전문점만 면옥이라고 부르는데, 일제강점기 당시 서울 시내에 가장 번성했던 면 전문점이 바로 냉면집이기 때문이다.[4] 중국집의 경우 식사부 외에 요리부도 겸해서 '청요릿집'이라는 명칭이 따로 있었고, 분식집은 1960년대 이후 정부의 분식장려 정책으로 생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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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 메소포타미아 지방에서 최초로 국수를 만들어 먹었다고 추정한다. 그러나 항아리에서 발견된 면 형태의 음식은 이집트에서도 발견된지라 발상지는 북부 아프리카라는 설도 있다. 인류의 시작이 아프리카인걸 감안하면 인류의 시작과 함께했을 전통요리일지도 모른다.
밀은 인류 농경 역사 극초기부터 함께해온 작물이지만 점질단백의 함량이 높아 호화(糊化,gelatinization)가 어렵고 거친 껍질을 분리하기도 어려워 가루내어 섭취하는것이 기본이 되었다. 이 가루를 물에 개어 그대로 구워내면 빵(무교병, 혹은 교병)이 되고 반죽 모양을 먹기좋게 가공하면 거기서부터 제면이 시작되는 것이다. 메밀을 비롯 다른 재료로 만들어낸 국수들은 밀가루면의 어레인지이거나 밀가루를 구하지 못해 대체재료로 만들어진 것이다. 온전한 독자발생이라고 하면 중남미의 옥수수 수제비 정도다.
인류 최고(最古) 문명 발상지와 가까운 중앙아시아 지역에서 가장 오래된 국수를 발굴하였다. 밀은 쌀과 달리 6~7겹의 질긴 껍질을 벗기고 빻아 밀가루를 채취하기까지 상당한 기술과 노동력이 필요하다. 반면 기온과 습도가 높은 아시아에서는 밀 대신 쌀을 주로 재배했다. 쌀은 노동집약적이면서 밀보다 산출량이 많아 더 많은 인구를 부양할 수 있다. 서쪽으로 퍼진 것은 최초의 국수와 가까운 형태인 파스타[5], 동쪽으로 퍼진 것은 쌀국수, 탕면 등 각기 독자 형태로 발전했다. 이후 아시아 쪽에서는 꽤 널리 퍼졌지만 유럽 쪽에서는 파스타를 제외하고는 그리 널리 보편화 하지 않았다.
한국에서는 삼국 시대나 남북국 시대에 전래되어 먹었다고 추정되나 구체적인 문헌 증거는 없다. 일단 고려도경에서 식사 접대를 할 때 내온 음식 중 하나로 국수를 언급하고 있어 늦어도 고려 시대부터 먹었던 것으로 보인다. 당시에 국수는 접대는 물론 제례에서도 사용하였으며 사찰에서 만들어 팔기도 했다. 노걸대에서 '우리 고려인은 습면(濕麵)[6]을 먹는 습관이 있다'는 내용이 기록되어 있어 생각보다 일상적으로도 자주 먹은 것으로 보인다.
재료면에서는 주로 메밀을 사용하거나 밀가루를 녹두나 전분과 섞는 방식으로 면을 만들었는데 이 중 메밀로 만든 국수 종류가 가장 많았다. 보통 한반도 북부에서는 메밀을 이용한 온면이나 냉면, 막국수가 발달했고 남부 지방은 밀가루를 이용한 칼국수가 발달했다. 현재까지 문헌에서 그 모양이 구체적으로 나오는 가장 오래된 국수는 녹말로 면을 만든 녹두나화이다.[7] 당시 한반도가 중국보다는 제분기술이 발달하지 않았다 보니 밀가루가 비쌌던지라 밀가루로 만든 국수는 성인식이나 혼인식같은 귀한 잔칫날에만 먹는 고급 음식이었다.[8]
일본의 대표적인 국수라고 할 수 있는 우동은 중국에서 들어왔으며 현재 전해지는 기록과 풍속화로 미루어 밀가루를 섞은 소바는 18세기 초에 등장한다. 그 이전까지는 메밀로 국수를 만든다는 개념이 없어서 그냥 메밀가루를 호화시켜 만든 소바가키(そばがき)라는 것을 먹었다.
근대 시기에는 일본에서부터 건면 제조를 시작하였는데 이후 한국 전쟁 때 미국에게서 받은 구호품으로 밀가루가 대량으로 풀린 이후 일반화되었다. 제2차 세계 대전이 끝나고 유럽의 농업이 정상화 할 때까지 오래 걸리리라고 여겨 밀가루를 대량으로 생산해 두었었는데 생각보다 빨리 정상화 하여 남아 돌던 밀가루가 한국, 일본까지 유입된 것이다. 이 때 원래대로라면 메밀로 만들던 냉면을 밀가루로 만들어 밀면이 탄생하는 등 새로운 면 국수요리가 생겼다. 그 당시엔 쌀이 부족했으니 비교적 싼 수입산 밀가루로 끼니를 대신할 수 있도록 혼분식 장려 운동을 시작하며 국수 문화를 다시 보편화 하였다.
밀은 인류 농경 역사 극초기부터 함께해온 작물이지만 점질단백의 함량이 높아 호화(糊化,gelatinization)가 어렵고 거친 껍질을 분리하기도 어려워 가루내어 섭취하는것이 기본이 되었다. 이 가루를 물에 개어 그대로 구워내면 빵(무교병, 혹은 교병)이 되고 반죽 모양을 먹기좋게 가공하면 거기서부터 제면이 시작되는 것이다. 메밀을 비롯 다른 재료로 만들어낸 국수들은 밀가루면의 어레인지이거나 밀가루를 구하지 못해 대체재료로 만들어진 것이다. 온전한 독자발생이라고 하면 중남미의 옥수수 수제비 정도다.
인류 최고(最古) 문명 발상지와 가까운 중앙아시아 지역에서 가장 오래된 국수를 발굴하였다. 밀은 쌀과 달리 6~7겹의 질긴 껍질을 벗기고 빻아 밀가루를 채취하기까지 상당한 기술과 노동력이 필요하다. 반면 기온과 습도가 높은 아시아에서는 밀 대신 쌀을 주로 재배했다. 쌀은 노동집약적이면서 밀보다 산출량이 많아 더 많은 인구를 부양할 수 있다. 서쪽으로 퍼진 것은 최초의 국수와 가까운 형태인 파스타[5], 동쪽으로 퍼진 것은 쌀국수, 탕면 등 각기 독자 형태로 발전했다. 이후 아시아 쪽에서는 꽤 널리 퍼졌지만 유럽 쪽에서는 파스타를 제외하고는 그리 널리 보편화 하지 않았다.
한국에서는 삼국 시대나 남북국 시대에 전래되어 먹었다고 추정되나 구체적인 문헌 증거는 없다. 일단 고려도경에서 식사 접대를 할 때 내온 음식 중 하나로 국수를 언급하고 있어 늦어도 고려 시대부터 먹었던 것으로 보인다. 당시에 국수는 접대는 물론 제례에서도 사용하였으며 사찰에서 만들어 팔기도 했다. 노걸대에서 '우리 고려인은 습면(濕麵)[6]을 먹는 습관이 있다'는 내용이 기록되어 있어 생각보다 일상적으로도 자주 먹은 것으로 보인다.
재료면에서는 주로 메밀을 사용하거나 밀가루를 녹두나 전분과 섞는 방식으로 면을 만들었는데 이 중 메밀로 만든 국수 종류가 가장 많았다. 보통 한반도 북부에서는 메밀을 이용한 온면이나 냉면, 막국수가 발달했고 남부 지방은 밀가루를 이용한 칼국수가 발달했다. 현재까지 문헌에서 그 모양이 구체적으로 나오는 가장 오래된 국수는 녹말로 면을 만든 녹두나화이다.[7] 당시 한반도가 중국보다는 제분기술이 발달하지 않았다 보니 밀가루가 비쌌던지라 밀가루로 만든 국수는 성인식이나 혼인식같은 귀한 잔칫날에만 먹는 고급 음식이었다.[8]
일본의 대표적인 국수라고 할 수 있는 우동은 중국에서 들어왔으며 현재 전해지는 기록과 풍속화로 미루어 밀가루를 섞은 소바는 18세기 초에 등장한다. 그 이전까지는 메밀로 국수를 만든다는 개념이 없어서 그냥 메밀가루를 호화시켜 만든 소바가키(そばがき)라는 것을 먹었다.
근대 시기에는 일본에서부터 건면 제조를 시작하였는데 이후 한국 전쟁 때 미국에게서 받은 구호품으로 밀가루가 대량으로 풀린 이후 일반화되었다. 제2차 세계 대전이 끝나고 유럽의 농업이 정상화 할 때까지 오래 걸리리라고 여겨 밀가루를 대량으로 생산해 두었었는데 생각보다 빨리 정상화 하여 남아 돌던 밀가루가 한국, 일본까지 유입된 것이다. 이 때 원래대로라면 메밀로 만들던 냉면을 밀가루로 만들어 밀면이 탄생하는 등 새로운 면 국수요리가 생겼다. 그 당시엔 쌀이 부족했으니 비교적 싼 수입산 밀가루로 끼니를 대신할 수 있도록 혼분식 장려 운동을 시작하며 국수 문화를 다시 보편화 하였다.
국수는 매우 익숙한 음식이지만, 역사가 깊은 만큼 다양한 변형이 생겨서 그것을 정의하는 범위가 워낙 포괄적이라 무엇을 국수라고 하는지 정의하기는 생각만큼 쉽지 않다. 일반적으로 곡물 가루[9]를 원료로 만든 주재료에 수프(간을 한 국물)[10]를 더해 먹는 음식을 면류로 정의한다.
통상 우동/라면/짬뽕같이 밀가루로 만든 길쭉한 면발의 주재료에 묽은 국물을 더한 형태를 전형적인 면류로 생각한다. 수제비/떡국같이 주재료의 모양이 일반적인 면발 모양이 아니어도 면류이고, 짜장면/스파게티같이 국물의 점도가 높은 것들도 면류이다. 위의 정의에 따르면 모양도 면발이 아니고 국물의 점도도 높은 떡볶이도 면류라고 할 수 있다. [11]
면에 속을 넣은 것, 즉 만두, 라자냐 등이 국수, 면에 들어가느냐는 찬반 양론이 맞서는 논쟁 거리이다. 예를 들어 페이스북의 국내 면 동호인들은 만두, 교자, 라자냐 등 소가 들어간 것도면으로 쳐 주자는 쪽이 우세하다. 이탈리아의 파스타에는 속이 들어가는 것이나 좁쌀 모양으로 만든 것까지 들어간다.
통상 우동/라면/짬뽕같이 밀가루로 만든 길쭉한 면발의 주재료에 묽은 국물을 더한 형태를 전형적인 면류로 생각한다. 수제비/떡국같이 주재료의 모양이 일반적인 면발 모양이 아니어도 면류이고, 짜장면/스파게티같이 국물의 점도가 높은 것들도 면류이다. 위의 정의에 따르면 모양도 면발이 아니고 국물의 점도도 높은 떡볶이도 면류라고 할 수 있다. [11]
면에 속을 넣은 것, 즉 만두, 라자냐 등이 국수, 면에 들어가느냐는 찬반 양론이 맞서는 논쟁 거리이다. 예를 들어 페이스북의 국내 면 동호인들은 만두, 교자, 라자냐 등 소가 들어간 것도면으로 쳐 주자는 쪽이 우세하다. 이탈리아의 파스타에는 속이 들어가는 것이나 좁쌀 모양으로 만든 것까지 들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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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적으로 시판되는 국수(소면)를 만드는 모습. 동영상
다양한 곡물가루, 대표적으로 쌀가루 또는 밀가루에 약간의 소금을 넣고 물로 반죽하여 면을 뽑은 뒤 말린 것이다. 이러한 건면은 이탈리아의 파스타 등도 있으나, 한국의 흔히 볼 수 있는 건면국수인 소면은 밀의 종류가 다르고 모양이 다르다. 파스타 중에서도 소면과 거의 비슷한 굵기의 카펠리 단젤로(천사의 머리카락)라는 것이 있다. 하지만 파스타 종류들은 듀럼밀을 사용하는 데다, 반죽할 때 물 대신 계란을 사용하기 때문에 식감이나 풍미가 전혀 다르다.
한국의 제면법은 분틀에 반죽을 넣고 눌러서 뽑아내는 압면(押麵), 반죽을 넓게 펴서 둘둘 말고 칼로 썰어내는 절면(絶麵)으로 이분화되어 있다.[12] 중국에서는 면을 만드는 방법에 따라 이름을 달리 부른다. 밀가루 반죽을 손으로 길게 늘려 만들면 라면(拉面)[13]이라 한다. 이외에도 수공면(手工面)[14]이나 도삭면(刀削面)[15] 등도 있다.
다양한 곡물가루, 대표적으로 쌀가루 또는 밀가루에 약간의 소금을 넣고 물로 반죽하여 면을 뽑은 뒤 말린 것이다. 이러한 건면은 이탈리아의 파스타 등도 있으나, 한국의 흔히 볼 수 있는 건면국수인 소면은 밀의 종류가 다르고 모양이 다르다. 파스타 중에서도 소면과 거의 비슷한 굵기의 카펠리 단젤로(천사의 머리카락)라는 것이 있다. 하지만 파스타 종류들은 듀럼밀을 사용하는 데다, 반죽할 때 물 대신 계란을 사용하기 때문에 식감이나 풍미가 전혀 다르다.
한국의 제면법은 분틀에 반죽을 넣고 눌러서 뽑아내는 압면(押麵), 반죽을 넓게 펴서 둘둘 말고 칼로 썰어내는 절면(絶麵)으로 이분화되어 있다.[12] 중국에서는 면을 만드는 방법에 따라 이름을 달리 부른다. 밀가루 반죽을 손으로 길게 늘려 만들면 라면(拉面)[13]이라 한다. 이외에도 수공면(手工面)[14]이나 도삭면(刀削面)[15] 등도 있다.
12세기 초, 송나라의 사신인 서긍이 지은 고려도경이 한국사에서 가장 오래된 국수 기록으로 확인되므로 고려대에 면식이 한반도에 정착한 것으로 추정된다. 고려도경에 따르면, 사신이 고려 경내에 들어오면 10여종의 면식을 제공받았고 그 중에서 해산물이 진기했다, 나라 안에 밀이 부족하다보니 면 가격이 비싸 큰 잔치가 아니면 먹지 않았단 기록이 있으며, 이규보의 동국이상국집에선 고명한 세 학자가 탕병의 손님이 되었단 내용이 적혀있는데, 이는 아기가 태어난 지 사흘이 됐을 때 탕병. 즉, 국수를 먹었단 내용으로 상술한 대로 잔치요리로 사용됐음을 유추할 수 있다.
조선시대에도 대부분의 국수는 메밀로 만들었고 밀로 국수를 만드는 경우는 흔치 않았다. 음식디미방에서 알 수 있듯 양반가에서도 밀가루와 메밀가루를 섞어 칼국수를 만들었고 남부 지방에서도 안동건진국수 처럼 귀한 밀가루에 콩가루를 섞어 국수를 만들었으며[16] 왕실에서도 메밀가루로 만든 국수를 먹었다.[17] 일제강점기 때 소면이 들어오긴 했지만 '조선인들은 메밀면, 일본인들은 소면'이란 말이 나올 만큼 여전히 메밀국수가 기본이었던 것이다. 화북처럼 여름을 제외하면 건조하여 밀을 기르기 적합한 기후를 가지고 있고 실제로도 일제강점기까지도 밀을 제법 길렀던 한국에서 밀가루 국수가 발달하지 않은 이유는 상술했듯이 풍차기술 조차도 없고 수차기술발전과 지리적 입지 미흡 때문에 제분기술이 미발달했기 때문이다.
잔치국수의 유래에 대한 민간어원으로 '밀가루가 옛날에는 흔하지 않은 식품이어서 양반이나 잔치 때나 밀가루 국수를 만들어 먹어서 잔치국수가 되었다'는 이야기가 있으나 실제 조선시대 사서나 요리책을 보면 전혀 사실이 아닌 이야기다. 소면 자체가 일제강점기 무렵에 한국으로 들어온 것이며, 조선 말기에는 소면을 왜면이라고 부를 정도로 낯설어 했다. 이 민간어원설에 살이 덧붙어서 한반도 남부가 농사 짓기 좋고 양반이 많아서 남한은 밀가루 국수 음식이 많다는 이야기가 돌기도 하지만 남한의 또 다른 밀가루 국수인 칼국수 역시 정작 조선시대에는 메밀 국수가 주류였고 미군정 때 막대한 밀가루 보급 이후로 메밀 칼국수에서 밀가루 칼국수로 변한 것이라는게 중론이다. 남부에서 농사가 잘 된다는 것도 역사적 사실과는 반대이며, 밀은 겨울나기를 하며 자라는 작물이라 한반도에선 똑같은 겨울나기를 하지만 비교적 추위에 약한 보리는 남부에서 키우고 북부에서는 밀을 키워서 조선시대와 일제강점기에는 주로 황해도와 평양 인근에서 밀이 많이 났다. #
아무튼 미군정이라는 짧은 시기 동안 한반도 남부 국수 식문화는 밀가루 위주로 바뀌었고 이러한 이유로 강원도, 경기도 동부를 제외한 남한 지역에서는 국수라 하면 잔치국수 등 따뜻한 면요리를 먼저 떠올리지만 강원도 및 경기도 동부에서는 국수라 하면 막국수라는 차가운 면요리를 먼저 떠올린다. 역시 북한의 평안도, 황해도 일대에서는 국수라 하면 일반적으로 냉면을 뜻하며 함경도로 가면 농마국수를 떠올린다. 개성 및 인근 지역을 제외한 이북 지역과 강원도에서는 따듯한 국수를 '온면'(溫麪)이라고 따로 불렀지만 이남 지역의 강원도는 수도권과 빈번히 교류하여 이제는 온면을 마냥 따로 구분하지만은 않는다.
대한민국의 대표적인 전통 국수요리는 냉면, 칼국수, 막국수, 고기국수, 올챙이국수, 콩국수, 간장국수 등이 있다. 구한말과 개화기부터는 외래 문화가 유입되며 짜장면, 짬뽕, 라면, 우동 등 한국식으로 어레인지된 국수 요리 및 잔치국수, 쫄면, 밀면, 비빔국수, 잡채[18]처럼 국내에서 새롭게 만든 면요리도 생겼다. 또한 분단 이후 이남 지역은 경제력 상승으로 인해 전 세계에서 음식 문화가 유입되어 2000년대 이후로는 파스타, 쌀국수 등 이국적인 국수들도 대중들 사이에서 인기를 끈다.
조선시대에도 대부분의 국수는 메밀로 만들었고 밀로 국수를 만드는 경우는 흔치 않았다. 음식디미방에서 알 수 있듯 양반가에서도 밀가루와 메밀가루를 섞어 칼국수를 만들었고 남부 지방에서도 안동건진국수 처럼 귀한 밀가루에 콩가루를 섞어 국수를 만들었으며[16] 왕실에서도 메밀가루로 만든 국수를 먹었다.[17] 일제강점기 때 소면이 들어오긴 했지만 '조선인들은 메밀면, 일본인들은 소면'이란 말이 나올 만큼 여전히 메밀국수가 기본이었던 것이다. 화북처럼 여름을 제외하면 건조하여 밀을 기르기 적합한 기후를 가지고 있고 실제로도 일제강점기까지도 밀을 제법 길렀던 한국에서 밀가루 국수가 발달하지 않은 이유는 상술했듯이 풍차기술 조차도 없고 수차기술발전과 지리적 입지 미흡 때문에 제분기술이 미발달했기 때문이다.
잔치국수의 유래에 대한 민간어원으로 '밀가루가 옛날에는 흔하지 않은 식품이어서 양반이나 잔치 때나 밀가루 국수를 만들어 먹어서 잔치국수가 되었다'는 이야기가 있으나 실제 조선시대 사서나 요리책을 보면 전혀 사실이 아닌 이야기다. 소면 자체가 일제강점기 무렵에 한국으로 들어온 것이며, 조선 말기에는 소면을 왜면이라고 부를 정도로 낯설어 했다. 이 민간어원설에 살이 덧붙어서 한반도 남부가 농사 짓기 좋고 양반이 많아서 남한은 밀가루 국수 음식이 많다는 이야기가 돌기도 하지만 남한의 또 다른 밀가루 국수인 칼국수 역시 정작 조선시대에는 메밀 국수가 주류였고 미군정 때 막대한 밀가루 보급 이후로 메밀 칼국수에서 밀가루 칼국수로 변한 것이라는게 중론이다. 남부에서 농사가 잘 된다는 것도 역사적 사실과는 반대이며, 밀은 겨울나기를 하며 자라는 작물이라 한반도에선 똑같은 겨울나기를 하지만 비교적 추위에 약한 보리는 남부에서 키우고 북부에서는 밀을 키워서 조선시대와 일제강점기에는 주로 황해도와 평양 인근에서 밀이 많이 났다. #
아무튼 미군정이라는 짧은 시기 동안 한반도 남부 국수 식문화는 밀가루 위주로 바뀌었고 이러한 이유로 강원도, 경기도 동부를 제외한 남한 지역에서는 국수라 하면 잔치국수 등 따뜻한 면요리를 먼저 떠올리지만 강원도 및 경기도 동부에서는 국수라 하면 막국수라는 차가운 면요리를 먼저 떠올린다. 역시 북한의 평안도, 황해도 일대에서는 국수라 하면 일반적으로 냉면을 뜻하며 함경도로 가면 농마국수를 떠올린다. 개성 및 인근 지역을 제외한 이북 지역과 강원도에서는 따듯한 국수를 '온면'(溫麪)이라고 따로 불렀지만 이남 지역의 강원도는 수도권과 빈번히 교류하여 이제는 온면을 마냥 따로 구분하지만은 않는다.
대한민국의 대표적인 전통 국수요리는 냉면, 칼국수, 막국수, 고기국수, 올챙이국수, 콩국수, 간장국수 등이 있다. 구한말과 개화기부터는 외래 문화가 유입되며 짜장면, 짬뽕, 라면, 우동 등 한국식으로 어레인지된 국수 요리 및 잔치국수, 쫄면, 밀면, 비빔국수, 잡채[18]처럼 국내에서 새롭게 만든 면요리도 생겼다. 또한 분단 이후 이남 지역은 경제력 상승으로 인해 전 세계에서 음식 문화가 유입되어 2000년대 이후로는 파스타, 쌀국수 등 이국적인 국수들도 대중들 사이에서 인기를 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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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수(한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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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북아시아 한중일 삼국 중 면류가 가장 발달한 국가이다. 그 중에서도 산시성(산서성) 국수 요리가 중국에서도 유명하다.
한국, 일본은 기후 혹은 토지 운용 문제상 밀을 주식으로 삼기 힘든 곳이 많은 반면, 중국은 땅덩어리가 넓은데다 문명의 발상지인 화북이 밀농사에 적합한 기후여서[21] 수천 년간 밀가루 요리를 주식으로 삼은 지역이 많았다. 아예 서양에서 수프를 먹을 때 빵을 뜯어서 넣어서 먹는 방식과 유사하게, 끓인 양고기 탕에다가 발효되지 않은 구운 빵을 손으로 잘게 뜯어 넣어서 수저로 떠먹는 식습관도 있다. 만두에서부터 밀전병 국수[22], 빵[23] 등을 주식으로 자주 먹어왔었다.
동아시아의 국수 전파만 하더라도 중국 송나라(북송)에서 자주 먹던 국수가 동아시아 각국으로 퍼지면서 시작되었다. 한국에서 국수를 본격적으로 먹기 시작한 때는 중국 송나라로부터 면이 전파된 고려시대부터로 추정되며 일본 또한 한국과 마찬가지로 중국에게서 국수 문화와 국수와 관련된 요리 기법들을 전파받았다.
중국 국수문화는 엄청나게 다양하다. 넓은 대륙에 수많은 식재료를 결합하여 새로운 국수를 창조한다. 그 예로 중국 류저우시에는 뤄쓰펀이라 불리는 달팽이, 정확히는 우렁이 국수가 별미로 손꼽힌다. 달팽이 국수에서 나오는 특유의 향을 좋아한다고 해서 인스턴트식품으로도 개발되었다고 한다.중국 달팽이 요리 쏸라펀은 충칭시를 대표하는 음식 중 하나다.
한국, 일본은 기후 혹은 토지 운용 문제상 밀을 주식으로 삼기 힘든 곳이 많은 반면, 중국은 땅덩어리가 넓은데다 문명의 발상지인 화북이 밀농사에 적합한 기후여서[21] 수천 년간 밀가루 요리를 주식으로 삼은 지역이 많았다. 아예 서양에서 수프를 먹을 때 빵을 뜯어서 넣어서 먹는 방식과 유사하게, 끓인 양고기 탕에다가 발효되지 않은 구운 빵을 손으로 잘게 뜯어 넣어서 수저로 떠먹는 식습관도 있다. 만두에서부터 밀전병 국수[22], 빵[23] 등을 주식으로 자주 먹어왔었다.
동아시아의 국수 전파만 하더라도 중국 송나라(북송)에서 자주 먹던 국수가 동아시아 각국으로 퍼지면서 시작되었다. 한국에서 국수를 본격적으로 먹기 시작한 때는 중국 송나라로부터 면이 전파된 고려시대부터로 추정되며 일본 또한 한국과 마찬가지로 중국에게서 국수 문화와 국수와 관련된 요리 기법들을 전파받았다.
중국 국수문화는 엄청나게 다양하다. 넓은 대륙에 수많은 식재료를 결합하여 새로운 국수를 창조한다. 그 예로 중국 류저우시에는 뤄쓰펀이라 불리는 달팽이, 정확히는 우렁이 국수가 별미로 손꼽힌다. 달팽이 국수에서 나오는 특유의 향을 좋아한다고 해서 인스턴트식품으로도 개발되었다고 한다.중국 달팽이 요리 쏸라펀은 충칭시를 대표하는 음식 중 하나다.
간토 지역에서는 소바가 유명하고, 간사이 지역에서는 우동이 대표적인 국수 요리이다. 특히 소바는 에도 시대에 제면법이 완성되어 수백 년이 지난 현재까지 완성된 형태가 변하지 않은 유서 깊은 음식으로 인기가 많다.
이러한 동서 구분은 현대의 일본에서 또 다른 양태로 드러나는데, 바로 라멘의 구분이다. 가장 서쪽 끝인 하카타(후쿠오카)는 중국과 오키나와의 영향으로 돼지뼈 국물이 진한 돈코츠 라멘을, 오사카 등 간사이 지역은 소금간을 한 시오라멘, 도쿄를 비롯한 간토 지역은 우동처럼 간장을 뿌려 간하는 쇼유라멘, 그리고 홋카이도 지역은 된장을 풀어넣은 미소라멘이 주력이다.
본토 외의 지역의 국수 요리로는 오키나와의 오키나와 소바가 유명한데 본래 오키나와는 밀을 기르기에 좋지 않은 기후 때문에, 밀가루 면요리는 그리 자주 먹을 수 있는 음식은 아니었으나 1902년 나하시에서 중국인 요리사가 면요리를 만들던 것을 시작으로 오키나와 소바가 등장하여 전쟁 후 미군 원조물자로 많이 들어온 밀가루를 사용해 오키나와 소바를 만들면서 많은 오키나와 소바 음식점들이 번성하였다.
이 외에도 전후 등장한 야키소바 역시 유명하다.
이러한 동서 구분은 현대의 일본에서 또 다른 양태로 드러나는데, 바로 라멘의 구분이다. 가장 서쪽 끝인 하카타(후쿠오카)는 중국과 오키나와의 영향으로 돼지뼈 국물이 진한 돈코츠 라멘을, 오사카 등 간사이 지역은 소금간을 한 시오라멘, 도쿄를 비롯한 간토 지역은 우동처럼 간장을 뿌려 간하는 쇼유라멘, 그리고 홋카이도 지역은 된장을 풀어넣은 미소라멘이 주력이다.
본토 외의 지역의 국수 요리로는 오키나와의 오키나와 소바가 유명한데 본래 오키나와는 밀을 기르기에 좋지 않은 기후 때문에, 밀가루 면요리는 그리 자주 먹을 수 있는 음식은 아니었으나 1902년 나하시에서 중국인 요리사가 면요리를 만들던 것을 시작으로 오키나와 소바가 등장하여 전쟁 후 미군 원조물자로 많이 들어온 밀가루를 사용해 오키나와 소바를 만들면서 많은 오키나와 소바 음식점들이 번성하였다.
이 외에도 전후 등장한 야키소바 역시 유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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짬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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긴 형태 때문에 동북아시아(한국, 중국, 일본) 등지에서는 장수[26]의 의미로도 사용되며, 때문에 생일에 국수를 먹는 풍습이 있다. 한국에서 설날이나 생일에 떡국을 먹는 것도 크게 보면 떡국 자체가 긴 '가래떡'으로 만드는 것이기 때문에 국수와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27] 이러한 맥락에서 아예 아주 기다란 한 가닥으로 한 그릇을 담아내는 '일근면' 같은 조리방식도 존재한다. 중국, 일본에서는 지금도 찾아볼 수 있지만, 한국의 경우는 다소 생소한 방식인 듯.[28]
한국 냉면에선 가위로 썩둑썩둑 면을 잘라주는 서비스(?)를 시행하는데, 먹기에는 무척 편해지지만 '장수 기원'이라는 문화적 코드와는 멀어진 방식이다. 한국을 제외한 면 문화권 사람들에게 면을 가위로 자르는 행위는 충격적으로 받아들인다. 물론 국수로 장수를 기원하는 문화는 한국도 공유하는 것이지만 오늘날 한국에서 냉면에 가위질하기는 실용성 면에서 비교적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는 편이다. 라면을 끓여 먹을때 면을 부수는 사람이 많고 자른 당면이 시중에 팔리는 등 한국에서는 실용성과 장수에 대한 연관성을 구분하는 편이다.
옛날엔 생일, 결혼식 등 잔치에서 자주 만들었다고 한다. 면발의 길쭉한 생김새에서 장수하라는 좋은 의미도 있었고, 무엇보다 면이 준비되면 빠르게 요리로 만들어 다수의 하객들에게 나눠줄 수 있었기 때문이다. 중국에서도 비슷하게 생일잔치 때 장수면(長壽麵)이라고 말 그대로 장수를 기원하는 의미로 먹는다.# 이 때 주의할 점은 면이 끊어지면 안 된다는 것. 때문에 한국에 오는 중국 관광객들이 생일을 맞이해서 냉면집을 들어가 냉면을 장수면으로 먹는데, 이걸 끊을 수도 없고 다 삼킬 수도 없고 해서 곤란한 상황에 처하는 광경을 가끔 볼 수 있다.
현대는 거의 뷔페지만, 아직 많은 사람들이 남의 결혼 소식을 들으면 '국수를 먹여준다'라는 관용어를 사용한다. 상대방에게 결혼을 언제 하느냐고 묻는 이야기를 할 때 '국수는 언제 먹여줄 거냐?'라고 묻는 관습이 아직도 남아있다. 실제로도 결혼식 때는 뷔페 메뉴에 잔치국수가 빠지지 않고 잡채나 비빔국수 등으로도 국수를 제공한다. 설령 양식 풀코스를 제공한다고 할지라도 메뉴에 스파게티가 있거나 소량이나마 국수가 서빙되는 경우가 많다.
한식에선 설렁탕이나 갈비탕 등의 탕류 요리에 소면, 당면 등을 넣기도 한다. 혼분식 장려 운동의 영향이 남은 것으로 그 시절에는 특정 요일에는 밥을 취급하지 못 했으니까 궁여지책으로 밥을 내놓는 대신에 국수를 넣어서 국수요리로 팔았던 것이었다. 물론 혼분식 장려 운동이 과거의 유산이 된 이후로는 면요리로 취급될 정도로 충분한 양을 넣지는 않고, 그냥 고명 역할을 하는 정도로 넣는 것이 일반적이다.
일본에서는 이사 온 사람이 이웃에게 국수를 돌리는 문화가 있다. 그냥 국물이 있는 국수를 돌리면 불기 때문에 주로 자루소바를 돌린다. 현대에 와서는 웬만한 시골이 아니면 그냥 포장된 건면을 사다가 돌리는 것이 일반적이다. 대개 양 옆집과 맞은편 집의 3곳에 돌리며 조금 여유가 있다면 맞은편 집의 양사이드까지 5곳에 돌린다.
그 외에 몇몇 외국에서도 잔치음식으로 국수를 쓰는 경우가 종종 있다.
한국 냉면에선 가위로 썩둑썩둑 면을 잘라주는 서비스(?)를 시행하는데, 먹기에는 무척 편해지지만 '장수 기원'이라는 문화적 코드와는 멀어진 방식이다. 한국을 제외한 면 문화권 사람들에게 면을 가위로 자르는 행위는 충격적으로 받아들인다. 물론 국수로 장수를 기원하는 문화는 한국도 공유하는 것이지만 오늘날 한국에서 냉면에 가위질하기는 실용성 면에서 비교적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는 편이다. 라면을 끓여 먹을때 면을 부수는 사람이 많고 자른 당면이 시중에 팔리는 등 한국에서는 실용성과 장수에 대한 연관성을 구분하는 편이다.
옛날엔 생일, 결혼식 등 잔치에서 자주 만들었다고 한다. 면발의 길쭉한 생김새에서 장수하라는 좋은 의미도 있었고, 무엇보다 면이 준비되면 빠르게 요리로 만들어 다수의 하객들에게 나눠줄 수 있었기 때문이다. 중국에서도 비슷하게 생일잔치 때 장수면(長壽麵)이라고 말 그대로 장수를 기원하는 의미로 먹는다.# 이 때 주의할 점은 면이 끊어지면 안 된다는 것. 때문에 한국에 오는 중국 관광객들이 생일을 맞이해서 냉면집을 들어가 냉면을 장수면으로 먹는데, 이걸 끊을 수도 없고 다 삼킬 수도 없고 해서 곤란한 상황에 처하는 광경을 가끔 볼 수 있다.
현대는 거의 뷔페지만, 아직 많은 사람들이 남의 결혼 소식을 들으면 '국수를 먹여준다'라는 관용어를 사용한다. 상대방에게 결혼을 언제 하느냐고 묻는 이야기를 할 때 '국수는 언제 먹여줄 거냐?'라고 묻는 관습이 아직도 남아있다. 실제로도 결혼식 때는 뷔페 메뉴에 잔치국수가 빠지지 않고 잡채나 비빔국수 등으로도 국수를 제공한다. 설령 양식 풀코스를 제공한다고 할지라도 메뉴에 스파게티가 있거나 소량이나마 국수가 서빙되는 경우가 많다.
한식에선 설렁탕이나 갈비탕 등의 탕류 요리에 소면, 당면 등을 넣기도 한다. 혼분식 장려 운동의 영향이 남은 것으로 그 시절에는 특정 요일에는 밥을 취급하지 못 했으니까 궁여지책으로 밥을 내놓는 대신에 국수를 넣어서 국수요리로 팔았던 것이었다. 물론 혼분식 장려 운동이 과거의 유산이 된 이후로는 면요리로 취급될 정도로 충분한 양을 넣지는 않고, 그냥 고명 역할을 하는 정도로 넣는 것이 일반적이다.
일본에서는 이사 온 사람이 이웃에게 국수를 돌리는 문화가 있다. 그냥 국물이 있는 국수를 돌리면 불기 때문에 주로 자루소바를 돌린다. 현대에 와서는 웬만한 시골이 아니면 그냥 포장된 건면을 사다가 돌리는 것이 일반적이다. 대개 양 옆집과 맞은편 집의 3곳에 돌리며 조금 여유가 있다면 맞은편 집의 양사이드까지 5곳에 돌린다.
그 외에 몇몇 외국에서도 잔치음식으로 국수를 쓰는 경우가 종종 있다.
한국에서도 사찰 요리 가운데 하나로 전파되었던 듯하다. 이미 고려 시대부터 사원에서 면을 만들어 판다는 기록이 있다. 사료를 보면 절에서 방문객들을 상대로 국수를 대접했다는 기록도 볼 수가 있다.
현재도 사찰에서는 국수를 스님의 미소라는 뜻의 '승소(僧笑)'라고 하는데, 공양으로 국수 나온다고 하면 스님들이 그냥 좋아서 빙긋 웃기 때문이다.[29] 누들로드에 출연한 선재스님의 설명에 따르면 아무래도 채식 위주의 식단이라 단백질이 부족할 수 있는데, 밀가루 글루텐도 단백질이므로 본능적으로 부족한 영양소의 보충을 위해 몸이 당겨서 그런 것이 더 강하다고 한다. 더구나 옛날에 국수는 요새로 치면 패스트푸드로 격 없이 먹을 수 있는 음식이었다. 특히 스님들의 식사예절인 발우공양은 대단히 길고 복잡한 것으로 유명한데, 성진 스님에 따르면 국수가 나오면 발우공양을 하지 않는다고 한다. 당연히 면이 다 불어버릴 테니... 그래서 실제로 오늘날의 스님들도 국수를 좋아한다고 한다. 영상
일본에서는 국수를 먹을 때는 소리 내어 먹는 예절이 있는데, 일본의 엄격한 선종 사찰에서도 국수를 먹을 때만큼은 소리내서 먹는 세속의 예절을 따른다. 평상시의 엄격한 기준을 좀 풀어준다는 뜻이다.
법정 스님은 한창 국수를 좋아하던 시절이 있어서 그 때는 남들이 몇 생을 거쳐야 먹을 국수를 먹었노라고 수필에 써놓았다. 가끔씩 외출을 할 때도 국수를 먹기도 했는데, 휴게소 우동이 제일 맛이 없었다고 한다. 며칠 동안 퉁퉁 불어터진 면이 이리저리 돌아다니다가 뜨거운 국물에 잠시 척 담가져서 사람 앞에 오기 때문이라고 말했다.[30] 물론 다 그런 건 아니고 어떤 지역 휴게소 보리국수는 상당히 맛있더라고 적어놓기도 했다. 그렇게 자주 국수를 먹어왔지만 어느 순간 갑자기 물려서 암자로 국수가 들어오면 근처 사찰로 다 보내버렸다고 한다.
일본에서도 가마쿠라 시대에 중국 송나라로 유학한 승려 엔니(円爾)[31]가 국수 뽑는 기계의 설계도를 가지고 제작하기 시작하여 절에서 행사가 있을 때만 먹는 종교의례용 음식이었지만 점차 민간으로 퍼지면서 대중화가 되었다고 한다. 또한 무를 갈아 국수에 곁들어 먹는 양념으로 쓰는 식문화를 비롯해 콩으로 국물 내기, 참깨를 절구로 갈아 으깨서 식재료로 쓰는 것 등 중국으로 유학 간 일본 승려들이 중국 선종(불교)을 배우면서 중국 사찰에서 먹던 식재료들과 조리기법들을 일본으로 가져온 것에서 기원했다. 이 때문에 일본의 국수 역사에서 일본의 불교, 승려, 사찰은 빠질 수 없는 존재로서 항상 언급된다. 1236년 쿠조 미치이에(九条道家)는 교토에 토후쿠지(東福寺)를 창건하고 엔니를 초대 주지로 모셔왔는데, 지금도 토후쿠지는 엔니의 기일이 되면 아예 면을 삶아 공양을 올린다.
현재도 사찰에서는 국수를 스님의 미소라는 뜻의 '승소(僧笑)'라고 하는데, 공양으로 국수 나온다고 하면 스님들이 그냥 좋아서 빙긋 웃기 때문이다.[29] 누들로드에 출연한 선재스님의 설명에 따르면 아무래도 채식 위주의 식단이라 단백질이 부족할 수 있는데, 밀가루 글루텐도 단백질이므로 본능적으로 부족한 영양소의 보충을 위해 몸이 당겨서 그런 것이 더 강하다고 한다. 더구나 옛날에 국수는 요새로 치면 패스트푸드로 격 없이 먹을 수 있는 음식이었다. 특히 스님들의 식사예절인 발우공양은 대단히 길고 복잡한 것으로 유명한데, 성진 스님에 따르면 국수가 나오면 발우공양을 하지 않는다고 한다. 당연히 면이 다 불어버릴 테니... 그래서 실제로 오늘날의 스님들도 국수를 좋아한다고 한다. 영상
일본에서는 국수를 먹을 때는 소리 내어 먹는 예절이 있는데, 일본의 엄격한 선종 사찰에서도 국수를 먹을 때만큼은 소리내서 먹는 세속의 예절을 따른다. 평상시의 엄격한 기준을 좀 풀어준다는 뜻이다.
법정 스님은 한창 국수를 좋아하던 시절이 있어서 그 때는 남들이 몇 생을 거쳐야 먹을 국수를 먹었노라고 수필에 써놓았다. 가끔씩 외출을 할 때도 국수를 먹기도 했는데, 휴게소 우동이 제일 맛이 없었다고 한다. 며칠 동안 퉁퉁 불어터진 면이 이리저리 돌아다니다가 뜨거운 국물에 잠시 척 담가져서 사람 앞에 오기 때문이라고 말했다.[30] 물론 다 그런 건 아니고 어떤 지역 휴게소 보리국수는 상당히 맛있더라고 적어놓기도 했다. 그렇게 자주 국수를 먹어왔지만 어느 순간 갑자기 물려서 암자로 국수가 들어오면 근처 사찰로 다 보내버렸다고 한다.
일본에서도 가마쿠라 시대에 중국 송나라로 유학한 승려 엔니(円爾)[31]가 국수 뽑는 기계의 설계도를 가지고 제작하기 시작하여 절에서 행사가 있을 때만 먹는 종교의례용 음식이었지만 점차 민간으로 퍼지면서 대중화가 되었다고 한다. 또한 무를 갈아 국수에 곁들어 먹는 양념으로 쓰는 식문화를 비롯해 콩으로 국물 내기, 참깨를 절구로 갈아 으깨서 식재료로 쓰는 것 등 중국으로 유학 간 일본 승려들이 중국 선종(불교)을 배우면서 중국 사찰에서 먹던 식재료들과 조리기법들을 일본으로 가져온 것에서 기원했다. 이 때문에 일본의 국수 역사에서 일본의 불교, 승려, 사찰은 빠질 수 없는 존재로서 항상 언급된다. 1236년 쿠조 미치이에(九条道家)는 교토에 토후쿠지(東福寺)를 창건하고 엔니를 초대 주지로 모셔왔는데, 지금도 토후쿠지는 엔니의 기일이 되면 아예 면을 삶아 공양을 올린다.
말린 국수는 들고 다니기 쉽고, 잘 상하지 않는다. 이는 실크로드를 지나갈 때 최고의 장점이었다. 그리고 아무 때나 간단하게 조리해서 먹을 수 있다. 그러므로 면 요리는 예나 지금이나 최강의 패스트푸드다.
물기를 없앤 국수는 보존기간이 굉장히 길어 비상식량처럼 쓰기도 한다. 다만 삶을 때 물을 상당히 많이 소비하기 때문에 식수를 구하기 힘든 환경이라면 물의 소비를 줄이는 조리방식을 써야 한다. 부숴서 죽처럼 쒀 먹는 것이 보통. 그마저도 여의치 않으면 국수 자체를 씹어서 먹을 수도 있기는 하다. 말린 음식은 수분을 흡수해 부풀어 오르기 때문에 국수를 그대로 씹어 먹는다면 많이 먹을 경우 배탈에 주의해야 했다고. 만약 연명(?) 비슷하게 사용한다면 많이 먹지 않는 게 좋다.
옛 중국에서도 튀긴 후 말린 국수를 전투식량으로 사용했다.[32] 다만 기름에 튀기면 몇 달 못 가 산패하기 때문에 과거라면 모를까 오늘날엔 그리 좋은 방법이 아니다.[33] 애당초 튀긴 국수도 보관기간이 길다는 점보다는 자연건조로 말리는 데 시간이 며칠씩 걸리는 건면보다 생산 후 빠르게 보관, 수송할 수 있는 상태로 만들 수 있다는 장점 때문에 채택된 것이다. 현대의 라면처럼 보통은 끓는 육수에 넣어 먹었지만 급박한 상황에서는 생라면 먹듯이 생으로 먹었다.
중세의 중동에서도 튀긴 국수를 즐겨먹었는데, 중국처럼 전투식량으로 사용한게 아니라 꿀이나 조청을 입히고 견과류를 뿌려서 과자로 먹었다.
물기를 없앤 국수는 보존기간이 굉장히 길어 비상식량처럼 쓰기도 한다. 다만 삶을 때 물을 상당히 많이 소비하기 때문에 식수를 구하기 힘든 환경이라면 물의 소비를 줄이는 조리방식을 써야 한다. 부숴서 죽처럼 쒀 먹는 것이 보통. 그마저도 여의치 않으면 국수 자체를 씹어서 먹을 수도 있기는 하다. 말린 음식은 수분을 흡수해 부풀어 오르기 때문에 국수를 그대로 씹어 먹는다면 많이 먹을 경우 배탈에 주의해야 했다고. 만약 연명(?) 비슷하게 사용한다면 많이 먹지 않는 게 좋다.
옛 중국에서도 튀긴 후 말린 국수를 전투식량으로 사용했다.[32] 다만 기름에 튀기면 몇 달 못 가 산패하기 때문에 과거라면 모를까 오늘날엔 그리 좋은 방법이 아니다.[33] 애당초 튀긴 국수도 보관기간이 길다는 점보다는 자연건조로 말리는 데 시간이 며칠씩 걸리는 건면보다 생산 후 빠르게 보관, 수송할 수 있는 상태로 만들 수 있다는 장점 때문에 채택된 것이다. 현대의 라면처럼 보통은 끓는 육수에 넣어 먹었지만 급박한 상황에서는 생라면 먹듯이 생으로 먹었다.
중세의 중동에서도 튀긴 국수를 즐겨먹었는데, 중국처럼 전투식량으로 사용한게 아니라 꿀이나 조청을 입히고 견과류를 뿌려서 과자로 먹었다.
국수는 대부분 가늘고 길게 만드는데 빨리 익도록 하기 위함이다.
크게 나누자면 가느다란 소면, 굵은 중면이 있는데, 소면이 중면에 비해 더 가늘고 소면 아래로 더 가는 세면이 있고 중면도 크기가 살짝 조금 더 큰 정도지만, 중면도 어느정도 차이가 날 수 있다. 그외 면에 다른 재료를 섞은 것도 있고, 칼국수처럼 넓적하게 나온 것[34]도 있으나 기본적인 소면과 중면이 가장 흔하고 많이 쓰인다.
동네 슈퍼마켓과 마트에서는 소면을 주로 팔고 더 해야 칼국수 정도인데, 요즘은 간편식을 선호하는 추세에 밀려 특히 칼국수는 면만 파는 상품은 줄어들었다. 국수맛을 아는 사람은 세면과 중면을 소면과 구별할 텐데, 가게에서 구하지 못했으면 온라인을 뒤져 보자. 업소용 납품은 잘 되는지 메이저 브랜드도 만든다.
소면은 주로 비빔국수용으로, 중면은 잔치국수용으로 쓰인다. 다만 고깃집 잔치국수는 소면이 많이 쓰인다. 대개 마트등에서 살 수 있는 건조된 면은 세면,소면,중면 정도로 나뉜다. 소면보다 더 작은 세면의 장점은 넘기기가 쉽고 금방 삶아져서 가스불을 오래 켜두지 않아도 된다는 것이 장점. 오히려 금방 삶아지기 때문에 삶는 시간을 잘 챙겨야 한다. 소면 보다도 부서지기가 가장 쉬우니 주의. 소면과 세면의 구분은 꽤나 미묘한 수준이지만, 대단히 가느다란 형태의 국수 가락들이 보통 세면으로 취급 된다. 세 가지 면을 동시에 늘어놓고 보면 확실히 차이가 나는 편.
크게 나누자면 가느다란 소면, 굵은 중면이 있는데, 소면이 중면에 비해 더 가늘고 소면 아래로 더 가는 세면이 있고 중면도 크기가 살짝 조금 더 큰 정도지만, 중면도 어느정도 차이가 날 수 있다. 그외 면에 다른 재료를 섞은 것도 있고, 칼국수처럼 넓적하게 나온 것[34]도 있으나 기본적인 소면과 중면이 가장 흔하고 많이 쓰인다.
동네 슈퍼마켓과 마트에서는 소면을 주로 팔고 더 해야 칼국수 정도인데, 요즘은 간편식을 선호하는 추세에 밀려 특히 칼국수는 면만 파는 상품은 줄어들었다. 국수맛을 아는 사람은 세면과 중면을 소면과 구별할 텐데, 가게에서 구하지 못했으면 온라인을 뒤져 보자. 업소용 납품은 잘 되는지 메이저 브랜드도 만든다.
소면은 주로 비빔국수용으로, 중면은 잔치국수용으로 쓰인다. 다만 고깃집 잔치국수는 소면이 많이 쓰인다. 대개 마트등에서 살 수 있는 건조된 면은 세면,소면,중면 정도로 나뉜다. 소면보다 더 작은 세면의 장점은 넘기기가 쉽고 금방 삶아져서 가스불을 오래 켜두지 않아도 된다는 것이 장점. 오히려 금방 삶아지기 때문에 삶는 시간을 잘 챙겨야 한다. 소면 보다도 부서지기가 가장 쉬우니 주의. 소면과 세면의 구분은 꽤나 미묘한 수준이지만, 대단히 가느다란 형태의 국수 가락들이 보통 세면으로 취급 된다. 세 가지 면을 동시에 늘어놓고 보면 확실히 차이가 나는 편.
세계 최초의 즉석식품이자 현재도 최고의 즉석식품이다.
소화가 잘 되는 특징 탓에 가벼운 이미지가 있지만, 엄연히 정제당이기 때문에 혈당지수와 칼로리는 상당히 높으며 그런 주제에 소화속도는 빵, 떡에 비해 빠른 편이라서 금세 허기가 지기 쉬우니 주의가 필요하다. 국수만 먹기보다는 고기나 계란, 식이섬유가 많은 식품을 같이 먹는 것이 금방 허기지는 것을 방지해준다.
소화가 잘 되는 특징 탓에 가벼운 이미지가 있지만, 엄연히 정제당이기 때문에 혈당지수와 칼로리는 상당히 높으며 그런 주제에 소화속도는 빵, 떡에 비해 빠른 편이라서 금세 허기가 지기 쉬우니 주의가 필요하다. 국수만 먹기보다는 고기나 계란, 식이섬유가 많은 식품을 같이 먹는 것이 금방 허기지는 것을 방지해준다.
[세계의 면 요리 종류(접기)]
국수의 칼로리가 걱정되는 사람들을 위해 천사채, 곤약면 등 대체재가 있다.
다큐멘터리 누들로드가 국수의 역사와 전세계의 국수 문화에 대해 집중적으로 다뤘다. 여기서는 만두까지 면 요리에 넣었다.
면이 아닌 국물 그 자체를 즐기는 요리들은 국물 요리 문서에서 따로 다룬다.
다큐멘터리 누들로드가 국수의 역사와 전세계의 국수 문화에 대해 집중적으로 다뤘다. 여기서는 만두까지 면 요리에 넣었다.
면이 아닌 국물 그 자체를 즐기는 요리들은 국물 요리 문서에서 따로 다룬다.
[1] 간체로는 '面'이라고 쓴다. 원래 麪이 정자이지만 정체자 사용지역에서도 홍콩을 제외하면 麪을 쓰지 않는다. 홍콩에서도 麵이 많이 쓰인다.[2] 신 중화일미에 이와 관련된 에피소드가 있다. 유마오신의 주사 시험에서 최종 문제가 '麵否麵'(면인데 면이 아닌 것)이었다. 麵의 부수인 麥가 떨어지면 면이 아니기 때문에 결선 진출자들은 이 뜻을 알아보고 밀가루가 아닌 재료로 국수를 만들기 시작했다. 시험문제를 국수 모양이 아닌 밀가루 음식으로 해석한 탄만 빼고...[3] 간판은 면옥인데 냉면이나 잔치국수 같은 면을 안 팔거나 고기 시킬 때 후식으로만 팔아 구색만 갖추는, 실제는 고깃집인 주객 전도 이름인 가게도 꽤 있다.[4] 면옥이라는 말을 조선에서도 아예 안 쓴 건 아니지만, 주로 일본에서 보이는 명칭이다. '멘야'라고 읽는다.[5] 이미 고대 로마 시절부터 먹었을 것으로 추정할 수 있는 파스타 만드는 도구를 발굴하였다.[6] 국물에 담은 국수를 말한다.[7] 첨언하자면 한국에서 쌀이 주식인데 비해 쌀국수가 대중적이지 않았던 이유는 쌀가루에 글루텐이 없었기 때문이다. 동남아와 한반도의 기후는 상당히 다른데 고온다습한 동남아시아에서는 쌀을 이기작·삼기작으로 사계절 내내 계속 생산할 수 있는 환경이었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재배가 용이한 쌀을 이용해 국수를 만드는 법이 발전하게 되었다. 그러나 한반도에서는 술과 조청 등 쌀로 우선 제조해야 할 2차 가공품이 있었으며 한반도와 동남아의 쌀 품종이 다른 것도 한몫 했다.[8] 밀 자체는 보리와 더불어 흔한 곡식이었으나 중국만큼 수차의 보급이 원활하지 않아 절구나 연자방아 등으로 제분을 했기 때문에 밀가루 보급에 한계가 있어 밀을 제분하여 국수나 빵으로 만들기 보다는 밀 알곡을 쪄서 밀밥을 지어 먹었다.[9] 주로 밀가루를 쓰지만 때에 따라서는 쌀가루나 메밀가루를 쓰기도 한다.[10] 국물의 점도(묽은 정도)는 다양할 수 있다.[11] 사실 떡볶이 떡은 지름이 좀 작은 가래떡을 다시 먹기 좋게 자른 것이므로 제조 공정상 면이 맞다.[12] 일설에 따르면 압면은 북부, 절면은 남부에서 주로 통용되다가 6.25 사변 이후로 압면법이 남쪽으로 내려왔다고도 하나, 분틀이 삼팔선 이북에만 있던 물건도 아니라 확실치는 않다.[13] 한국의 수타면과 같다.[14] 반죽을 얇게 편 후 말아서 칼로 써는 한국식 칼국수와 비슷하다.[15] 반죽을 크고 길쭉한 덩어리로 만들어 한쪽 손과 같은 쪽 어깨에 지고 다른 손으로 칼로 스치듯 베어내어 만든다.[16] 여기에는 재래종 밀의 부족한 중력과 탄력을 보완하기 위한 것도 있다.[17] 세종실록에는 왕실에서 사용할 메밀이 부족해져 새로 할당하는 내용이 나와 있다. 메밀 사용법은 밀과 크게 다를 게 없는데, 수라상으로 메밀밥이 오르지 않았음을 감안하면 전이나 국수 말고는 사용처가 그리 많지 않았다고 추측할 수 있다.[18] 잡채 자체는 원래부터 있던 궁중 요리지만 당면을 넣기 시작한 것은 일제강점기 이후부터다.[19] 한국식 중화요리이다.[20] 인스턴트 식품이지만 거의 고유 명사처럼 될만큼 전 세계적으로 공전의 히트를 기록했다.[21] 비가 많이 오지 않고 추운 평야지대라 벼농사를 짓기 힘든 기후였기 때문이다. 하북에서는 조, 밀, 수수 등을 재배했고 그 중 가장 비중이 높았던 건 밀이었다. 화남 지방은 반대로 온난하고 비가 많아 벼농사에 적합하다. 당연히 이쪽은 쌀이 주식.[22] 국수 종류가 다양한데 일본 우동이나 소바, 한국 냉면이나 잔치국수 주듯이 그냥 큰 그릇에 하나의 면류를 주는게 아니라 면을 제각각 조그만 그릇에 조금씩 담은 다음 다양한 소스에 비벼서 먹는 방식도 존재한다.(보통 4~6가지 정도 나온다.) 요리왕 비룡에서 이것을 그리기도 했다.[23] 이미 당나라 시절부터 호식이라고 해서 이러한 면, 밀가루를 이용한 빵 등을 먹어왔다. 다만 중국에서 먹어온 빵들 중 상당수가 오늘날 생각하는 서양식 빵이 아닌 서역에서 먹어온 빵 모양과 상당히 유사하다. (특유의 넓고 납작한 빵도 중국에선 자주 먹는다.) 중국에서 오랫동안 주로 먹어왔던 대부분 빵은 서역의 빵과 비교하면 발효를 하지 않는 등 몇 가지 차이점이 있다.[24] 한국식 짜장면의 원형이다.[25] 미국식 중화요리화된 대표 메뉴, 판다 익스프레스의 대표 메뉴이기도 하다.[26] 긴 목숨. 즉, 오래 사는 것.[27] 덧붙여 동그랗게 자른 가래떡은 은편 내지는 엽전과 닮은 모양이라 조선 시대 문화에서는 돈을 상징하기도 한다. 즉 조선시대 떡국은 장수와 재물복을 바라는 의미를 담은 것이라 할 수 있다.[28] 미운우리새끼에서 김건모가 시전한 바 있다.[29] 국수 이외에 떡과 만두도 역시 승소라고 했다.[30] 실제로 휴게소 우동은 시판용 면과 국물을 미리 준비해두고 주문이 들어오면 면만 해동해서 국물에 담아서 내놓으므로 엄청 빨리 나오는데 반대급부로 맛이 뛰어나다고 보기는 어렵다.[31] 생몰 1202-1280. 사후에 쇼이치 국사(聖一国師)란 시호를 받아 일본인들에겐 이 이름으로도 유명하다. 송에서 임제종을 배워 일본으로 전했다.[32] 이러한 점은 돌아돌아 인스턴트 라면을 튀겨서 만드는 데 영향을 끼쳤다.[33] 그래서 유탕면(대표적으로 라면)의 보존 기간도 5~6개월로 짧은 편이다.[34] 이걸 칼국수라는 이름으로 파는데, 사실은 일본의 건우동면에서 온 것으로 보인다. 일본산 건우동면(건사누키 우동 등)을 사면 모양이 비슷하다.[35] 참고로 이북 지역에서 "국수"라 하면 이 평양식 물냉면을 뜻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