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격은 사용하는 총기(소총,권총,샷건)나 표적과의 거리(10m,25m,50m) 등을 기준으로 세부 종목이 나눠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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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8월 31일부터 9월 14일까지 15일 동안 창원 국제사격장에서 91개국 4250여명이 참가한 가운데 2018 국제사격연맹(ISSF) 세계사격선수권대회가 열렸다. 1897년 원년 대회가 열린 이후 제52회 대회였다. 한국은 금 11개, 은 14개, 동메달 11개로 역대 최고인 종합 2위를 차지했다. 이번 대회는 국내에서 열린 두번째 세계사격선수권이었다. 지금으로부터 꼭 40년전인 1978년 9월 서울 태릉사격장에서 제42회 세계사격선수권대회가 열렸다. 이 대회는 한국이 해방이후 개최한 최초의 스포츠 빅이벤트였다. 그래서 지금 40대 후반 이상의 올드 스포츠팬에게는 이 대회도 아스라한 추억으로 남아있다.
한국의 스포츠 역사에서 1978년 세계사격선수권대회가 갖고 있는 의미는 매우 크다. 가난했던 극동의 가난하고 조그만 나라에서(요즘 젊은 세대에게는 믿기 힘든 이야기겠지만 한국은 1970년대 초반만 해도 북한에게 경제적으로 뒤져있었다는게 정설이었다. 하지만 시기적으로 이 대회가 열렸던 1970년대 후반부터 체제 경쟁에서 본격적으로 앞서 나가기 시작했다) 세계 규모의 스포츠 이벤트를 성공적으로 치러낸 자신감을 바탕으로 올림픽 유치라는 거대한 꿈을 꾸기 시작할 수 있었다. 이후 '10.26'~'12.12'~'5.18'로 이어지는 건국 이래 최대의 정치적 혼란속에서 올림픽 유치 계획은 침몰했다가 되살아나는 과정을 거치면서 결국 '바덴바덴의 기적'을 만들어낸다.
이 웅장한 드라마에 주연급으로 등장하는 인물들이 박정희 전두환 노태우 박종규 김운용 같은 당대의 권력자들이었다. 국가주의적 가치를 내걸었던 '스포츠 코리아'의 한 본질적 내면을 우리는 1978년 세계사격선수권대회를 통해서 은밀하게 살펴볼 수 있다. 정치와 경제와 스포츠가 얽히고 설킨 유용한 연구 사례다.
박재구 전 대한사격연맹 이사는 '제42회 세계사격선수권대회의 한국 유치와 체육사적 의미'라는 논문에서 '올림픽 정식종목인 세계사격선수권대회를 훌륭히 운영해 올림픽 개최 능력을 세계에 알리게 됐다. 당시 대한사격연맹 회장이었던 박종규 회장은 1979년 대한체육회장으로 취임해 제42회 대회에서 얻은 자신감으로 박정희 대통령에게 올림픽 유치를 건의했다. 정치적 변동으로 잠시 주춤했으나 올림픽 유치운동을 다시 시작해 1988 서울 올림픽 대회를 개최할 수 있었다'고 평가하고 있다. 마침 올해는 서울 올림픽 개최 30주년이 되는 해이다. 40년전 세계사격선수권대회 개최를 통해서 쏘아올린 '스포츠 코리아'의 한 단면을 살펴보는 것도 의미가 있겠다.
(이하 주요 등장인물의 직함은 인용글이 아닌 경우 모두 생략했음을 미리 밝힌다.)
◇사격이란 무엇인가
사격은 양궁과 더불어 타깃 스포츠의 양대 산맥이라고 할 수 있다. 두 종목은 총 또는 활을 사용해서 일정한 거리의 표적을 맞혀 그 정확도를 점수로 따지는 경기라는 공통점이 있다. 또 전쟁이나 생존이라는 인간의 본질적인 욕구를 기원으로 하는 스포츠이기도 하다. 실제로 스포츠의 탄생 배경으로 전쟁이나 생존을 위한 사냥을 지목하는 학설이 있다. 이런 주장에 따르면 사격과 양궁같은 타깃 스포츠는 개인 원거리·공성전투기술이나 개인 근접전투기술에서 파생됐다는 공통점을 갖고 있다.(이에 대해서는 윤동일 저, '모든 스포츠는 전쟁에서 나왔다', p.112~118과 p.155~158 참조)
사격의 생명은 정확도이기에 일찍이 총이 발명된 이후 군대 등에서 끊임없이 기술을 연마하고 기량을 겨룰 수밖에 없었다. 전투나 사냥에서 쓰이는 기술로 많이 인식됐던 사격이 언제부터 스포츠로 진화했는지는 설이 분분하다. 1477년 독일 바이레른의 아이히슈테프에서 사격 경기가 열렸다는 기록이 있는데 유럽에 총기 보급이 확대되면서 15~17세기에 걸쳐 사격 경기가 많이 열렸다고 한다. 1897년 프랑스 리옹에서 5개국이 참가해 5종목을 겨루는 제1회 세계사격선수권대회가 개최됐고, 근대 올림픽에서는 1896년 제1회 아테네 올림픽부터 정식 종목으로 채택됐다. 국제사격연맹(ISSF,International Shooting Sport Federation)은 1907년에 창립총회를 가졌는데 '스포츠로서의 사격'임을 강조하기 위해서 기구명에도 '스포트'를 넣었다.
사격은 사용하는 총기(소총,권총,샷건)나 표적과의 거리(10m,25m,50m) 등을 기준으로 세부 종목이 나눠진다. 2016 리우 올림픽까지는 남자 9개, 여자 6개 등 총 15개의 메달이 걸려있었다. 남자는 10m 공기 권총, 10m 공기 소총, 25m 속사 권총, 50m 권총, 50m 소총 3자세, 50m 소총 복사, 더블트랩, 트랩, 스키트의 9종목이었고 여자는 10m 공기 권총, 10m 공기 소총, 25m 권총, 50m 소총 3자세, 트랩, 스키트의 6종목이었다. 하지만 2020 도쿄올림픽부터는 세부 종복의 변화가 생겼다. 남자 50m 소총 복사와 50m 권총, 더블트랩 등의 3개 종목이 폐지되고 혼성 종목 3개(10m 공기 소총, 10m 공기 권총, 트랩)가 신설됐다.
◇박정희 정권은 왜 사격에 집중했을까?
1978년 세계사격선수권대회 유치부터 1988년 서울 올림픽 개최까지 이어지는 '스포츠 코리아'의 거대한 흐름을 살펴보기 위해서는 박정희.전두환 정권의 체육정책 방향과 권력내의 인맥 관계를 면밀히 검토해 볼 필요가 있다.
박정희 정권(제3,4공화국)과 전두환 정권(제5공화국)은 쿠데타로 집권한 군부 통치 세력이라는 공통점이 있다. '권력은 총에서 나온다'는 마오쩌둥의 어록을 몸으로 실천해서 권력을 잡은 정권들이다. 생리적으로 총과 친숙하고, 밀접한 관계가 있다. 역대 대한사격연맹 회장단의 이름을 살펴보면 흥미로운 인물이 두명 등장한다. 1965년부터 제7~8대 회장을 지낸 김형욱과 그 뒤를 이어 1970년부터 9~13대 회장을 지낸 박종규다. 김형욱과 박종규는 박정희 정권의 최고 파워맨으로 손꼽힌다. 김형욱은 중앙정보부장으로 무소불위의 권력을 누렸고, 경호실장이었던 박종규는 박정희 정권의 '호위무사'로 통했다. 박정희가 집권했던 제3,4공화국 내내 군부 출신인 두명의 권력 실세가 대한사격연맹 회장직을 사실상 독점했다는 것은 단순히 우연으로 보기만은 어렵다.
'1965년 대한사격연맹 회장에 취임한 김형욱 당시 중앙정보부장은 우수 선수를 양지 소속(당시 중앙정보부)으로 뽑아 선수 양성에 심혈을 기울였다. 1970년 대한사격연맹 회장으로 박종규 대통령 경호실장이 취임하면서 사격계 발전에 박차를 가하게 되었고, 태릉국제사격장의 완공을 기념해 제2회 대통령 하사 봉황기 쟁탈 전국사격대회를 개최하는 등 활발한 움직임을 보이게 됐다. 박종규가 체육계와 인연을 맺은 것은 대통령 경호실장으로 있으면서 대한사격연맹 회장직을 겸임한 1970년 1월부터였다. 그 당시 북한이 아시아 경기 대회 등 각종 국제대회의 사격 부문에서 독주하고 있는데 아쉬움을 갖고 있던 그는 사격연맹 회장직을 수락해 자신의 장기이기도 한 사격 종목에서의 선수 저변확대 및 경기력 향상에 노력을 기울였다.' (박재구 동덕여대 대학원 박사학위 논문 '대한사격연맹회장 박종규의 생애사' p.34~36)
널리 알려졌듯 육군종합행정학교 출신인 박종규는 권총의 달인이었다. 직선적이고 불같은 성격과 항상 권총을 소지하고 있는 직책상의 특성이 반영된 별명도 '피스톨 박'이었다. 박종규는 박정희 정권내내 정치와 체육 양 부문에서 지대한 영향력을 행사했다. 서울 올림픽 유치의 초기 아이디어가 그에게서 나오고 강력하게 추진될 수 있었던 것도 정치와 체육이라는 양대 분야에서 파워맨으로 통했던 그의 개인적인 위치가 발현된 결과로 볼 수 있다.
'제3공화국의 수반 박정희는 각 분야에 대리인을 배치하거나 전문가 집단을 장악해 이들을 철저히 관리하는 봉건적 지배 시스템을 사용해 정권을 유지 보존했다. 그는 김종필 김형욱 차지철 박종규같은 정치 지배그룹과 박태준 정주영 이병철 등 경제인 그룹, 체육 분야에는 민관식 박종규 김택수 등을 전면에 배치해 이들을 통해서 스포츠-체육 정책을 입안하고 시행하는 정책을 펼쳐나갔다.' (허진석 저, '스포츠 공화국의 탄생' p.18~19)
위의 인용 글에서도 알 수 있듯이 박종규는 권력 핵심이면서도 체육계에도 깊게 관여하는 '이중적 위치'에 있었다. 그 연결고리가 바로 사격이었다. 1970년대 초반의 대한체육회 자료를 살펴보면 사격 종목에 대한 국가 지원이 타 종목에 비해서 압도적으로 많았음을 확인할 수 있다. 1971년 체육 경기단체에 대한 국고 보조금 지원 현황을 보면 전체 지원액수 가운데 무려 46%가 사격에 지급됐다. 축구(27%)와 태권도(16%)를 휠씬 넘어서고 있다. 사격에 지원된 금액은 제2회 아시아 사격선수권대회 운영비와 태릉국제사격장 클럽하우스 건립비 등에 쓰여졌다.
'당시 개최하는 대회(제2회 아시아 사격선수권대회)는 단순히 사격기술 및 경기력 향상을 위한 것뿐만 아니라 세계적으로 우리나라의 위상을 높이기 위하여 차질없이 준비하도록 박정희 대통령이 지시한 것으로, 당시의 우수 선수를 육성하고 발굴하려는 국가 스포츠정책으로 보여진다. 경기단체 및 민간단체에 대한 국고 지원현황을 살펴보면 사격 종목의 예산이 가장 많이 편성됨을 확인할 수 있었다. 이같이 사격에 대한 국가적인 관심은 상당했으며 지원 또한 아끼지 않았던 것이다. 이는 절대 권력자인 박정희 대통령과 그의 최측근인 박종규가 있기에 가능하였던 것이다.' (박재구 박사논문, p71~72)
박정희 정권이 사격에 신경썼던 또다른 원인은 북한과의 경쟁심이었다. 박정희와 김일성이 벌였던 남북한의 체제 경쟁은 말그대로 전방위로 펼쳐졌는데 스포츠도 그 최전선의 역할을 담당했다. 실제로 해방 이후 한국 스포츠의 대외 경쟁력을 키운 가장 큰 요소는 다름아닌 북한과 일본에 대한 극심한 경쟁심이었다. 강준만 전북대 교수는 '과거 한국 축구를 키운 2대 원동력은 한일관계와 남북관계였다. 다 지더라도 일본과 북한에만큼은 이겨야 한다는 살인적인 투쟁심이 축구 열기를 지펴 왔다'고 지적했다.(강준만 저, '축구는 한국이다' p.12) 이 글에서 '축구'를 '스포츠'로 살짝 일반화한다고 해도 별다른 무리는 없을 것이다.
북한이 1966년 잉글랜드 월드컵에서 8강 진출이라는 엄청난 성적을 올리자 이에 자극받은 한국은 중앙정보부 산하에 양지 축구팀을 급조해 파격적인 지원에 나섰다. 당시만 해도 정치와 체육은 이처럼 직접적으로 엮여있었다.
'북한의 8강 진출에 가장 충격을 받은 건 한국, 그중에서도 북한 담당 부서인 중앙정보부였다. 중앙정보부는 진상 조사(?)에 들어갔다. 대회를 관전했던 축구협회 부회장 김용식과 이사 오완건은 중앙정보부에 불려가 진술하는 자리에서 국가대표급 선수들을 모아 팀을 만들어야 북한을 따라잡을 수 있다고 건의했다. 이에 중앙정보부장 김형욱이 주도해 1967년 1월 양지축구단을 탄생시켰다. 국가대표팀이 중정 소속의 실업팀으로 변모한 것이었다.'(강준만의 책,p.106)
이 양지 팀에 축구외의 종목으로 사격팀이 있었다는 것이 참으로 특기할 만 하다. 양지팀을 직접 만들었던 김형욱은 당시 대한사격연맹 회장직을 맡고 있었다. 양지팀에서 뛰었던 김호 전 축구국가대표팀 감독은 '삼위일체'와 통화에서 "양지 소속으로는 축구외에도 사격팀이 있었다. 두 팀은 훈련은 별도로 했지만 가끔 식당에서 조우하기도 했다. 사격팀에는 장교 출신과 민간 출신 선수가 섞여있었던 것으로 기억한다"고 말했다.
축구에 이어 사격 부문에서도 '북한 쇼크'가 터졌다. 1972년 뮌헨 올림픽에서 북한은 사상 처음으로 올림픽에 출전했다. 첫 출전한 올림픽에서 북한은 사격 남자 50m 소총 복사에서 리호준이 599점(600점 만점)이라는 세계신기록으로 금메달을 차지했다. 한국의 첫 올림픽 금메달은 4년 뒤인 몬트리올 올림픽(레슬링 양정모)에서야 비로소 이뤄진다. 리호준은 금메달을 딴 뒤 가진 기자회견에서 "원수의 심장을 쏘는 심정으로 쐈다"는 섬뜩한 소감을 남겼다. 한국이 받은 쇼크는 이 살벌한 소감으로 배가될 수밖에 없었다. 뮌헨 올림픽에서 북한 사격이 준 충격의 여파로 박종규는 더욱 국내 사격계 활성화를 위해서 힘을 기울이게 됐고 각종 국내 대회를 창설한데 이어 결국 1974년에는 제42회 세계사격선수권대회 유치에 발벗고 나서게 된다.
◇'5달러'가 만든 기적, 아시아 최초로 세계사격선수권대회를 유치하다
1978년으로 예정된 제42회 세계사격선수권대회의 개최지는 1974년 10월 스위스 베른에서 열린 ISSF 총회에서 결정됐다. 지금은 하계 올림픽(1988년 서울) 동계 올림픽(2018년 평창) 월드컵(2002년) 세계육상선수권대회(2011년 대구) 등 지구촌의 메가 스포츠이벤트는 모조리 한번씩 개최해본 나라가 됐지만 1970년대만 해도 상황이 전혀 달랐다. 한국은 1970년 제6회 아시안게임을 유치했다가 재정난으로 포기해 망신을 샀다. 1978년에는 제32회 세계역도선수권대회를 유치했다가 시설 문제로 대회를 반납하기도 했다.
'(제6회 아시안게임 유치를 확정한 다음해인)1967년이 되자 설왕설래가 이어졌다. 문제는 돈이었다. 정부가 예산을 재검토하면서 소요되는 돈은 17억원에서 35억원까지 다양했다. 당초 생각해뒀던 7억5000만원을 초과하는 것은 분명했다. 박정희 대통령은 결국 경제에 부담을 줄 것이라며 개최 포기를 지시했다. 국제적 망신이었다. 개최를 2~3년 앞두고 경기 반납을 선언했으니 한국을 보는 시선도 싸늘해졌다.'(김학균 외 저 '기억을 공유하라! 스포츠한국사',p.72)
재정적인 여력도, 국내 인프라도, 국제스포츠계에서의 위상과 외교력도 대규모 국제대회를 유치하기에는 많이 부족했다. 그런 시절에 세계사격선수권대회 유치에 나선 것은 권력 핵심부의 지원없이는 애당초 불가능한 일이었다. 박종규가 바로 그 축이었다. 하지만 ISSF 총회를 앞두고 예기치 못했던 정치적 변수가 터졌다. 그해 8월 15일 광복절 행사장에서 재일동포 문세광의 대통령 저격 미수 사건이 벌어진 것이다. 그날 현장에서 영부인 육영수 여사가 대신 문세광의 총탄에 서거했다. 경호실장이었던 박종규는 당연히 이 사태에 총체적인 책임을 지고 자리에 물러난 뒤 근신할 수밖에 없었다. 대회 유치 신청을 해놓았는데 막상 이를 지휘할 사령탑이 없는 황당한 상황이 벌어진 셈이다. 이때 등장한 인물이 바로 김운용(당시 대한체육회 부회장.대한태권도연맹 회장)이다. 그는 훗날 국제올림픽위원회(IOC) 부위원장이 되는 등 한국이 낳은 국제스포츠계 최고 거물로 성장한다. 김운용의 회고를 직접 들어보자.
'박종규 회장은 8월의 육영수 여사 피격 사건 이후 경호실장을 그만두고 근신중이었다. 총회에 갈 형편이 아니었다. 세계대회 유치 신청을 해놓고 총회에 갈 사람이 없는 상황이 된 것이다. 박 회장이 나에게 대신 총회에 가달라고 간청을 했다. 소련이 주도하는 동구권과 북한이 한국이라면 사사건건 방해를 할 때였다. 국제사격연맹 내부 사정에도 어두워서 "자신 없다"고 사양했는데 간청에 못이겨 허락해 버렸다."(김운용 '남기고 싶은 이야기', 중앙일보 2008년 10월 20일자)
한국의 경쟁 상대는 멕시코였다. 멕시코는 1968년 올림픽을 치러낸 경험이 있었다. 국제사격연맹내 인맥도 한국보다 좋았다. 여기에 북한이 한국의 유치 활동에 노골적인 반대 운동을 펼치고 있었다. 여러모로 우리가 불리한 상황이었다. 한국의 유치 성공을 예상한 이는 드믈었다. 하지만 궁하면 통한다고 했던가. 김운용의 회고를 조금 더 인용해 본다.
'세계사격대회 유치를 놓고 한국과 맞선 멕시코가 1인당 하루 숙박비 10달러라는 파격적인 조건을 제시하는 바람에 우리는 더욱 불리해졌다. 정상적으로 붙으면 도저히 이길 방법이 없었다. 나는 "한국 태릉사격장 시설은 세계수준이고 손님맞이를 할 준비가 다 되어있다. 아시아에서 한번도 세계대회를 한 적이 없다. 우리에게 기회를 달라"고 읍소했다. 그리고 "우리는 1인당 하루 5달러에 숙식을 제공하겠다"고 폭탄 제의를 했다. 원래는 멕시코보다 약간 적은 9달러나 8달러는 생각했는데 그 정도로는 도저히 이길 수 없을 것같았다. 돈 아끼다가 지는 것보다 이기는 게 상책이라는 생각에서 독단적으로 그렇게 말해버렸다.' (김운용 '남기고 싶은 이야기', 중앙일보 2008년 10월 21일자)
투표 결과는 62대 40으로 한국의 승리였다. 예상치 못한 승전보를 전해들은 박종규는 크게 기뻐했다고 한다. '5달러의 승부수'는 마치 나비효과처럼 이후 국제 스포츠계에 길고도 큰 파동을 일으켰다. 이날 유치 성공을 기점으로 한국은 4년 뒤 사격대회를 성황리에 치러냈고, 그 자신감을 바탕으로 1988년 서울올림픽 유치에 나서서 일본 나고야를 상대로 또한번의 '역전 드라마'를 만들어내게 된다. 이 순발력있는 판단과 결정에 대해서 영국 출신 스포츠 저널리스트인 데이비드 밀러는 이렇게 평가하고 있다.
'멕시코시티는 마리오 바스케스 라냐(멕시코사격연맹 회장)를 통해 선수 일인당 숙식비 10달러에 대회를 유치하겠다고 신청해 놓고 있었다. 그런데 계산이 빠르고 실속있는 투자감각을 가진 김운용은 총회에서 5달러를 제안했다. 결과는 102명중 62표를 얻은 서울에 개최권이 돌아갔다. 올림픽 대회의 미래사, 심지어 동북아의 정치.경제적 세력균형이 이름도 없는 스위스의 한 회의실에서 이뤄진 순발력있는 결정에 의해 형성됐다고 말하더라도 지나친 과장은 아닐 것이다.' (데이비드 밀러 저, '올림픽 혁명' p.175)
제42회 대회 이전까지 세계사격선수권대회는 사격의 본고장인 유럽에서 거의 개최됐고 간간히 미주대륙에서 열렸다. 아시아에서 개최되는 것은 한국이 처음이었다. 이 대회의 유치 성공은 이후 동서냉전을 허무는 한 계기가 됐고 한국의 북방정책이 본격화되는 1988년 서울 올림픽까지 이어지면서 밀러의 표현대로 동북아 정치경제의 세력균형을 흔들었다. 또한 한국 스포츠사에 거대한 획을 긋는 출발점이 됐다.
사족을 덧붙이면 김운용의 '5달러 공약'은 과연 어떻게 됐을까. 그의 회고에 따르면 정작 1978년 대회에서는 40달러를 받았다고 한다. 순발력있는 공약이 항상 정직하게 지켜지는 것이 아니라는 것도, 역사의 한 아이러니라고 하겠다.
[네이버 지식백과] 사격 (올림픽 종목 소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