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2018) |
요약 사적 제503호. 대한불교조계종 제5교구의 본사. 553년에 의신 조사가 창건했으며, 절이름은 불경을 나귀에 싣고 돌아와 머물렀다는 설화에서 유래된 것이다. 776년에 진표가 이 절을 중창했고 그의 제자에 의해 미륵신앙의 중심도량이 되었다. 왕실의 비호 아래 8차례의 중수를 거쳐 60여 개의 건물과 70여 개의 암자를 갖춘 대찰이 되었다. 임진왜란으로 모든 전각이 소실된 것을 1624년(인조 2)에 중창한 후 여러 차례의 중수를 거쳐 오늘에 이르고 있다. 국가지정문화재인 쌍사자석등(국보 제5호)·석련지(국보 제64호)·사천왕석등(보물 제15호)·마애여래의상(보물 제216호) 등이 있다. 2018년 6월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다.
대한불교조계종 제5교구의 본사. 사적 제503호.
법주사 전경, 충북 보은군 내속리면 사내리 속리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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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553년(진흥왕 14)에 의신(義信) 조사가 창건했으며, 법주사라는 절 이름은 의신이 서역으로부터 불경을 나귀에 싣고 돌아와 이곳에 머물렀다는 설화에서 유래된 것이다. 776년(혜공왕 12)에 금산사를 창건한 진표(眞表)가 이 절을 중창했고 그의 제자 영심(永深) 등에 의해 미륵신앙의 중심도량이 되었다. 그후 법주사는 왕실의 비호 아래 8차례의 중수를 거쳐 60여 개의 건물과 70여 개의 암자를 갖춘 대찰이 되었다.
고려 숙종이 1101년 그의 아우 대각국사를 위해 인왕경회(仁王經會)를 베풀었을 때 모인 승려의 수가 3만이었다고 하므로 당시 절의 규모를 짐작할 수 있으며, 조선시대에 태조와 세조도 이곳에서 법회를 열었다고 전한다. 임진왜란으로 모든 전각이 소실된 것을 1624년(인조 2)에 벽암이 중창한 후 여러 차례의 중수를 거쳐 오늘에 이르고 있다.
주요 문화재
현존하는 건물은 1624년에 중건된 대웅전, 1605년에 재건된 국내 유일의 5층 목탑인 팔상전, 1624년에 중창된 능인전(能仁殿)과 원통보전(圓通寶殿)이 있고 이밖에 일주문·금강문·천왕문·조사각·사리각, 선원(禪院)에 부속된 대향각·염화실·응향각이 있다. 또한 법주사의 중심법당이었으며 장육상(丈六像)을 안치했었다는 용화보전(龍華寶殿)은 그 터만 남아 있고, 이곳에 근대조각가인 김복진이 조성 도중 요절했다는 시멘트로 된 미륵불상이 1964년에 세워졌다.
1986년 이를 다시 헐고 1989년 초파일에 높이 33m의 청동미륵불상이 점안(點眼)되었다. 이밖에 국가지정문화재인 쌍사자석등(국보 제5호)·석련지(石蓮池:국보 제64호)·사천왕석등(보물 제15호)·마애여래의상(보물 제216호)·신법천문도병풍(新法天文圖屛風:보물 제848호)·괘불탱(보물 제1259호)과 지방지정문화재인 세존사리탑(충청북도 유형문화재 제16호)·희견보살상(喜見菩薩像:충청북도 유형문화재 제38호)·석조(石槽:충청북도 유형문화재 제70호)·벽암대사비(충청북도 유형문화재 제71호)·자정국존비(慈淨國尊碑:충청북도 유형문화재 제79호)·괘불(충청북도 유형문화재 제119호)·철확(鐵鑊:충청북도 유형문화재 제143호) 등이 있다.
세계문화유산
2018년 6월 30일 제42차 세계유산위원회에서 '산사(山寺), 한국의 산지승원'이라는 명칭으로 1천 년 넘게 우리 불교문화를 계승하고 지킨 종합승원 7곳 가운데 하나로 그 문화적 가치를 인정받아 한국의 13번째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다. 함께 등재된 다른 여섯 곳은 양산 통도사, 영주 부석사, 안동 봉정사, 공주 마곡사, 순천 선암사, 해남 대흥사이다.
법주사마애여래의상
보물 제216호. 높이 500cm. 광배는 생략되었으며 두 손은 가슴 앞에서 설법인(說法印)을 결하고 있고 연화좌 위에 걸터앉아 두 다리를 내려딛고 있는 의상(倚像)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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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리는 나발이며 육계 밑에 계주가 표현되어 있고, 얼굴은 둥근형으로 살이 쪘으며, 턱 밑의 주름과 짧은 목에 표현된 삼도가 목걸이처럼 늘어져 있다. 눈꼬리가 길게 위로 치켜올라가 있고, 납작하게 눌린 듯한 코는 살찐 뺨에 파묻혀 있는 듯하다. 상체는 두 어깨가 각이 진 편으로 허리가 지나치게 좁게 표현되었고, 오른쪽 어깨를 드러낸 우견편단으로 옷을 입고 있다. 두 무릎 역시 어깨처럼 각이 지게 표현되어 있다. 신체비례로 보면 하체가 허리와 상체에 비해 매우 빈약하지만 밑에서 올려다보면 어느 정도 균형이 잡혀 있는 것같다.
전체적인 조각수법은 얼굴을 제외한 신체 각 부분의 묘사가 평면적이며 옷주름은 거의 선각으로 형식화되어 있다. 그러나 불신의 윤곽선, 손가락의 묘사, 연화대좌의 꽃잎 형태는 매우 자연스럽고 부드러운 회화적인 곡선으로 섬세하게 표현되어 있다. 고려불화 가운데 1350년에 제작된 〈미륵하생경변상도〉(일본 신노인[親王院] 소장)의 본존불과 세부표현에서 많은 유사점이 발견된다. 역사적으로 법주사는 미륵신앙의 중심도량이었으므로 이 불상조성의 신앙적 배경으로 미륵신앙이 주목된다.
이 불상의 수인인 설법인은 현존하는 한국 불상 가운데 드문 도상으로 통일신라시대의 안압지 출토 금동삼존판불에서 볼 수 있으며, 의상의 자세는 경주 남산 삼화령 출토 석조삼존불상 중 본존불의 예가 있다.
보은 법주사 석련지
국보(1962.12.20 지정). 높이 195cm. 지대석 위에 올려진 반개한 연꽃이 있는 화강석 수조이다. 지대석은 8각이며 각 면의 좌우에 우주를 새기고 안상을 하나씩 조각했다. 그 위에 3단의 각형 받침을 두었으며 받침 위에는 겹꽃의 내림연꽃을 돌려 간석을 받치고 있다.
충청북도 보은군 속리산면 사내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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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석은 잘록한 원기둥 모양이며 표면에 구름무늬가 새겨져 있다. 간석 위에 올려진 연지는 균열이 생겨 철제꺾쇠로 고정시켜 놓았으며 표면의 아랫부분에 단엽의 올림연꽃을 돌려 꽃받침과 같은 형태를 이루고 있는데 잎 끝에 약간의 반전이 있다.
연지의 나머지 표면에는 큼직한 올림연꽃을 8개 새기고 그 사이에 작은 연잎을 새겼으며, 8개의 큰 잎 내부에는 각각 화려한 보상화무늬를 돋을새김했다. 연지의 입 언저리에는 얕은 난간을 세웠는데 아랫부분의 난간벽에는 돌려가며 방주를 모각하고 그 사이에 천인상과 보상화무늬 등을 돋을새김했다. 이 연지는 유사한 예를 찾아볼 수 없고, 용도가 확실하지 않으나 연꽃 화생의 극락정토를 상징하는 것으로 물을 담아 연꽃을 공양하는 데 쓰였던 것으로 추측된다.
전체적으로 장중한 비례를 보여주며 조각장식이 섬세하고 화려해 전성기 불교미술의 한 예로 주목된다.
보은 법주사 쌍사자 석등
국보(1962.12.20 지정). 높이 330cm. 이 석등은 일반형 석등의 간석 부분을 8각기둥 대신 쌍사자로 변화를 준 이형석등이며, 쌍사자석등의 전형적인 예에 속한다. 지면에 놓인 넓은 8각 지대석의 옆면에는 상하에 테를 두르고 우주를 새겼으며, 윗면 중앙에는 2단의 괴임을 두어 하대석을 받치고 있다.
법주사쌍사자석등(통일신라), 국보 제5호, 높이 330cm, 충북 보은군 내속리면 사내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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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대석과 간석을 대신한 쌍사자와 상대석은 하나의 돌로 되어 있다. 하대석 역시 8각이며 옆면에는 단판의 내림연꽃이 8개 조각되어 있다. 그 위에 사자 2마리가 뒷발을 하대석에 버티고 마주 서서 앞발로 상대석을 떠 받치고 있는데 머리와 갈기와 다리 근육이 사실적으로 조각되었다. 상대석에도 단판의 올림연꽃이 상하로 조각되었으며 연판 안에 꽃무늬가 장식되어 있다.
상대석 위에 얹힌 8각의 화사석에는 4면에 장방형 화창이 있고 화창 주위에 작은 구멍이 남아 있다. 8각의 개석은 처마 밑이 수평이며 추녀 끝에 약간의 반전이 있고 내림연꽃이 조각된 정상부에는 보주만 남아 있다. 8각을 기본으로 하면서 간석에 변화를 준 이 석등은 구성이 간결하고 전체 비례가 적당하여 통일신라시대 석등의 걸작으로 꼽히며 8세기경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된다.
보은 법주사 팔상전
국보(1962.12.20 지정). 5층의 옥개는 네모지붕이며 그 위에 상륜부가 완전하게 남아 있다. 1968년 해체 중수할 때 5층 도리에서 상량문이 발견되고 심초석에서 사리장치와 함께 동판에 새긴 글이 발견되었는데, 그 내용에 의하면 팔상전은 임진왜란 때 완전히 소실된 것을 1605년에 재건하고 1626년에 중수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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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물은 2단의 석조기단 위에 세워졌는데 기단의 각 면 중앙에는 돌계단이 있다. 건물의 평면은 정사각형이며 건물의 외관은 층이 높아지면서 주간의 수가 줄어들어 강한 체감을 보이는데 1·2층은 5칸, 3·4층은 3칸, 5층은 2칸이다.
공포의 짜임은 금산사 미륵전이나 쌍봉사 대웅전에서 볼 수 없었던 특수한 방식으로 1층은 주심포식이지만 2층 이상은 다포식이다. 1층은 기둥머리에 창방을 돌리고 공포의 헛첨차는 기둥머리에 꽂혔으며 공포의 구성은 주심포식 2출목인데, 첨차는 조선 말기의 매우 장식적인 파련각으로 장식되어 있다. 2, 3, 4층의 공포는 모두 기둥 위에만 있으나 다포식 구성에 속하며, 5층은 기둥머리와 창방 위에 평방을 돌린 완전한 다포식이다.
내부 가구는 다층구조의 일반적 기법을 따라 5층 건물 전체를 통과하는 심주가 중앙에 있으며 네 모서리 안쪽에 귀고주[隅高柱]를 세웠다. 2층의 우주는 1층 우주와 귀고주를 연결한 퇴보[退樑] 위에 세워졌다. 3층 역시 2층과 같은 형식으로 기둥을 세웠으며 4층은 귀고주가 바로 4층의 우주로 되어 있다. 이 귀고주는 심주와 대들보[大樑]로 연결되며 5층 우주는 이 대들보 위에 세워졌다. 심주는 기단 윗면의 심초 위에서 5층 옥개 밑 중도리까지 이른다. 이 건물에는 심주의 4면에 각 2폭씩 8폭의 팔상도가 있고 그 앞으로 4면에 열반상을 포함한 삼존불상을 각각 배치했으며 이어서 3열로 천불상을 봉안했다.
이 건물은 1968년 해체·조사된 바로는 각 층마다 구조가 다르고, 재목의 사용이나 공포구성법·체감률 등 건축법식면에서도 무질서하고 혼란해 부정적 평가를 받았지만 국내에 현존하는 유일한 5층목탑으로서 중요성이 인정되고 있다.(→ 목탑) 즉 17세기에 건축된 목탑이지만 부분적으로 고대 목탑을 복원하는데 고찰할 수 있는 자료이며, 건축법에 있어서도 다양하고 이질적인 요소들을 조화롭게 통일시킨 건축미를 보여주는 것으로 재평가되고 있다.